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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고 싶어! by. 550(@550____)

 

 달조차 뜨지 않은 어두운 밤이었다. 간간이 불을 밝힌 집들이 보였지만 골목길은 인적 없이 조용했다.

 하얀은 침을 삼켰다. 심장이 얼마나 두근거리는지 귀가 먹먹했다. 왼발로 땅을 디딘 다음에는 오른발을 내밀어야 하는지, 다시 왼발을 내밀어야 하는지 헷갈렸다. 손에 땀도 나는 것 같았다. 안 돼! 손바닥이 축축해지면 기영이 불쾌하게 느낄 것 같았다. 하얀은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 사이로 가느다란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오늘 난생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았다. 야경이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도 했다. 모두 기영이 데려가 준 것이었다. 기영은 그 공연이 자신의 에이전시와 관련이 있어 우연히 표를 얻었다며 신경쓰지 말라고 했지만, 하얀은 그가 언젠가 자신이 한 번도 그런 공연을 본 적이 없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서 준비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이 지나가며 한 말까지, 놓치지 않고 기억해주었다는 점이었다. 연애를 해 본적은 없었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하얀은 식사를 하는 내내 공연에 대한 감상을 종알거렸고 기영은 웃으면서 그것을 들어주었다. 몸이 가벼워져서 한없이 위로, 위로 떠오른 것만 같았다.

 오늘의 데이트는 정말로, 정말로 완벽했다. 절대로 ‘미끌미끌한 손’으로 마무리할 수 없었다! 하얀은 고개를 열심히 가로저었다.

 이런 완벽한 데이트의 끝은, 자고로 ‘미끌미끌한 손’ 같은 게 아니라…….

연애 경험은 없지만, 그대신 수많은 로맨스 소설을 독파했던 하얀이었다. 이런 데이트의 마무리에 늘 클리셰처럼 등장하던 스킨십이 떠올랐다.

 ‘키, 키, 키…….’

 긴장으로 손가락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따뜻하고 커다란 기영의 손이 한 손 가득 잡혔다.

하얀이 꼼지락거리는 것을 느낀 기영이 걸음을 멈추었다. 하얀이 눈만 굴려 그를 올려보았다.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에 물든 그는 샤프한 인상임에도 따뜻하고 온화하게 느껴졌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입술은 유난히 붉었고, 얇지만 도톰했다. 하얀은 일순 자신이 넋을 잃고 그의 입술만 바라보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왜 그래?”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헤, 헤헤…….”

 하얀이 고개를 열심히 저었다. 저, 절대로 들키면 안 돼! 심장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요란하게 뛰었다. 하얀은 자연스럽게 손을 빼내서 손사래를 쳤다. 잽싸게 원피스 위로 손바닥을 문질러 땀을 닦아냈다. 기영은 그런 하얀을 바라보며 잠자코 미소지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다시 손을 잡고 밤거리를 걸었다. 하얀은 상기된 뺨을 문질렀다.

 “집까지 데,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오빠. 저 호, 혼자 올 수 있었는데…….”

 “시간이 늦었잖아. 데려다주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래도요. 감사해요. 그리고 오,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저…… 진짜 좋았어요. 그런 데… 늘 가고 싶었는데 왜, 왠지 혼자 가기 좀 그래서 못 갔거든요. 아무도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요…….”

 “그래? 화실에 같이 일하는 친구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 소, 소라요? 네, 친구…. 헤헤. 친구예요! 그런데… 몸이 약해서요, 어디 멀리 가는 건 모… 못한대요. 그래서요.”

 “음. 그랬구나.”

 하얀은 바닥을 보고 걸었다. 흰색 샌들과 검은색 로퍼가 사이좋게 발맞춰 움직였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누군가와 발맞춰 걸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던가.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까. 설렘과 불안이 뒤섞여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하얀은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바… 바보같죠…….”

 별안간 기영이 작게 웃더니 한쪽 손으로 하얀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하얀은 숨도 쉬지도 못하고 얼어붙었다.

 “네가 왜 바보야.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되게, 바, 바보같지 않아요?”

 하얀은 이상할만큼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고자 속삭이듯이 되물었다. 기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전혀. 난 네가 하고싶은데 못한 것들이 이거 말고도 많았을 것 같아서, 그게 신경쓰이는데.”

 그러고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앞으로는 나한테 얘기해. 뭐든 같이 하자.”

 그의 어조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서, 하얀은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 이제껏 그렇게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절대로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 그것은 아주,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키스하고 싶어.

 치밀어오른 충동에 하얀이 잘게 몸을 떨었다. 기이한 열망이 멈출 줄 모르고 가슴에서 타올랐다. 그녀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기영에게 한발짝 가까이 붙어섰을 때,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하얀은 꿈에서 깨어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집 앞이었다.

 “아……!”

 이성을 잃고 그에게 달려들 뻔 했다는 것을 깨달은 하얀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기영이 입을 가리고 쿡쿡 웃고 있었다. 허둥지둥 그를 살펴본 하얀은 그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안심했다. 기영이 자신의 의도를 눈치채기 전에 집에 도착했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왜냐면… 처, 첫 키, 키, 키스는 남자가 하는 거라고!’

 하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로맨스 소설로 연애를 배운 하얀은 이상한 선입견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조심히 들어가, 하얀아.”

 “네, 네. 오빠도 조… 조심히 돌아가세요.”

 그가 하얀의 머리를 쓰다듬고 돌아섰다. 하얀은 그가 쓰다듬은 자리에 손을 얹은 채 멀어지는 그가 점점 작아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했다.

 어깨를 맞대고 듣던 교향곡의 선율. 슬그머니 손을 잡자 내치지 않고 꼭 잡아주던 기다란 손마디. 귓바퀴를 스치던 따뜻한 손끝.

 어떤 바보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무시하지 않고 지켜봐주던 갈색 눈동자. 앞으로는 뭐든 함께 하자고 말해주던 낮은 목소리.

 어둡던 세상에 새로운 색깔이 채워지는 것만 같았다.

 사랑……. 자신이 사랑에 빠져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이 생길 줄도, 자신이 아끼는 사람이 생길 줄도 몰랐다. 하얀은 창 밖으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어둑해진 거리에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그저 암흑의 구렁텅이로만 보였을 밤은, 어두운 와중에도 가로등에서 퍼져나간 따뜻한 노란 불빛으로 은은하게 물들어 있었다. 앞으로 밤거리와 가로등을 보면 오늘의 일이 떠오를 것이 분명했다.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단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뿐인데, 어느새 세상은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아름답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기영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해질수록 하얀의 세상은 더욱 놀랍게 변할 것이었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날 밤은 오래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문이 닫혀있는데도 로비까지 수강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얀이 화실을 지킬 때는 수강생들은 물론이고 같은 선생인 소라까지, 누구도 감히 큰 소리를 내지 못했으므로 소라는 틀림없이 그녀가 결근을 했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잘 됐다고 생각했다. 로비에서 화실까지 가는 발걸음이 가벼운 것은 처음이었다. 힘있게 문을 열어젖히던 소라가 사색이 되어 문턱에서 멈춰섰다. 흰 원피스를 입은 하얀이 수강생의 캔버스 앞에 서서 붓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팔을 놀릴 때마다 옷자락이 하늘하늘 부드럽게 흔들렸다. 미소가 완연한 얼굴이었다.

 “정……하얀님?”

 “으응, 소라야. 히, 히힛. 안녕.”

 하얀이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소라는 두려움에 질려 입만 뻐끔거렸다. 저들끼리 숙덕거리는 수강생들도 소라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정선생님 오늘 왜… 저러실까요?”

 “모르겠어요.”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보죠.”

 “원수라도 죽었나?”

 “주, 죽이신 거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오늘의 하얀은 정말 이상했다. 여느 때라면 ‘어떻게 이것도 못해?’ 하는 눈으로 힐난했을 수강생들의 질문에도 나름대로 친절하게 가르쳐주려는 듯 했고(물론 수강생들이 알아듣기에는 지나치게 추상적인 설명이었다),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혼자서 소리내어 웃기도 했다. 언제나 굳은 얼굴로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던 선생님이 갑작스레 살갑게 변한 것이 어색한 수강생들이 오들오들 떨었다. 화구를 정리하던 소라도 함께 떨었다. 하얀은 그들의 반응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콧노래를 불렀다.

 몇시간이 지나자 수강생들이 빠져나갔다. 하얀은 강의실 맨 뒤에 놓인 캔버스 앞에 앉아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몹시 집중을 한 모양인지 한시간 전부터는 소라나 수강생들이 부르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이히힛!”

 “히이익……!”

 하얀이 갑자기 몸을 떨며 웃더니 몸을 배배 꼬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2층에서 청소를 마치고 내려오던 소라가 그 소리를 듣고 소름이 끼쳐 2층으로 다시 뛰어 올라갔다. 벽을 짚고 헐떡이던 그녀의 눈에 벽에 걸린 캔버스가 들어왔다. 얼룩덜룩하고 지저분한 터치로 그려진, 검붉은 그늘 속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붉은 눈알과 시선이 마주쳤다. 소라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청소를 할 때에도 신경을 곤두세워가며 보지 않으려 애썼던 그림이었는데, 무심코 시선을 주고 말았다. 덜덜 떨며 양 팔을 감싸자 피부에 온통 소름이 돋은 것이 만져졌다.

 하얀은 빼어나게 우수한 화가였다. 기술이 뛰어난 것은 물론이고 누구라도 그녀의 개인작을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만큼 화풍도 무척 독특했는데, 아직 이름이 없는 화가였다. 그것은 화풍이 아주 어둡고 기괴하기 때문이었다. 하얀은 주로 사람이나 신체 일부가 등장하는 풍경화를 그렸는데, 그 풍경이 실제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지옥처럼 끔찍하고 공포스럽게 보였다. 특유의 일그러진 형상과 정신 나간 듯한 색감이 문제였다. 그림에 나타난 사람은 어째서인지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으며 캔버스에 자그맣게 등장한 신체의 일부마저 괜히 토막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하얀의 자리가 화실 맨 구석에 위치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었다. 처음에는 딱히 지정석이 없어서 하얀은 아무 자리나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는 했는데, 그녀의 작업을 본 수강생들이 하도 두려워하기에 자리를 구석으로 옮긴 것이었다.

 처음 하얀의 그림을 보았던 날. 소라도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고 악몽을 꾸었다. 뜨겁고 검붉은 세계에서 칼을 든 귀신에게 쫓기는 꿈이었다.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이히힛, 이히힛….’ 하고 웃는 여자 귀신이었다.

 무서웠다. 단순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정말로 무서웠다. 그 이후로 소라는 하얀을 두려워했다. 쌀쌀맞고 음침한 태도보다도 화풍이 끼친 영향이 컸다. 머리로는 터무니 없는 망상이라고 생각해도, 하얀은 정말로 그림에 저주를 담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마음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그래서 그 뒤로 하얀이 퇴근 후 식사를 하자거나, 어디로 놀러가자고 제안했을 때마다 몸이 좋지 않다며 칼처럼 거절을 했다. 소라에게 하얀은 최대한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소라는 아예 그림의 반대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곳에는 스탠드형 에어컨이 얌전히 꺼진 채 놓여 있었다. 아까 청소할 때에도 봤지만, 오늘은 분명히 2층에 냉방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하얀은 웃음소리만으로도 이렇게나 주변 온도를 낮출 수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었다.

 ‘쟤랑 같이 일 못하겠어……. 이직하고 싶어!’

 하지만 당장 현 직장만큼 좋은 조건의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순수 예술인의 비애였다.

 미우나 고우나 하얀은 계속 마주해야만하는 직장 동료였다. 이대로 계속 두려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마침 오늘은 기분도 유난히 좋아보이니…… 대화라도 나눠볼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이전 같았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생각이었지만. 소라는 계단 아래를 굽어보았다.

 “흐흥, 헤헤…… 힛, 헤헤.”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몇 달간 매일같이 보면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만약 자신이 하얀과 대화를 나누어야만 한다면, 이보다 최적의 시기는 없을 것이었다. 소라는 침을 삼켰다. 마음을 가다듬고서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어깨를 위아래로 들썩이며 붓을 놀리는 하얀이 보였다. 소리는 발소리를 죽이고 하얀의 뒤로 걸어갔다. 갈색 머리카락이 늘어진 동그란 어깨 너머로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 보였다.

 “……세상에.”

 소라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제야 인기척을 눈치챈 하얀이 고개를 돌렸다.

 “소라야! 어, 어때? 새로 그리고 있는 그, 그림이야.”

 반짝이는 눈망울이 소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저건…….”

 “응, 응! 헤헤, 자꾸 새, 생각이 나서……. 설레는 마음을 표, 표현해봤어.”

 두 사람은 문제의 캔버스 앞에 의자를 나란히 끌어놓고 앉아 있었다. 하얀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소라는 그녀가 양 손가락을 수줍게 꼬물거리는 것을 기가 막힌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뭐, 뭐랄까. 처음 느, 느낀 감정이라서. 그, 그리고 오빠는 특별하니까! 하, 한번도 안 써본 색감으로 표현해봤는데……. 사실 처, 처음엔 벼, 별로면 어쩌나 싶었는데, 마음에 들어!”

 듣자하니, 난생 처음 데이트한 심경을 캔버스에 담아낸 것이라고 했다. 소라는 조금, 음침하기는 해도 예쁘장한 하얀이 스무살이 넘도록 한 번도 데이트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지만 감히 티를 내지 못했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하얀에게서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자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초현실적으로 일렁이는 선과 탁하고 거친 채색법은 그대로였다. 다만 평소 하얀이 즐겨쓰던 지옥의 유황같은 검붉은 색감 대신 밝고 온화해보이는 난색 계열의 물감들이 캔버스에 꽃밭처럼 울긋불긋 화사하게 덧발라져 있었다. 어쩌면, 멀리서 보거나 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 정말로 예쁘게 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소라는 질린 표정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 하하하…… 그, 그렇군요. 정말… 예뻐요. 정하얀 님!”

 “저, 정말? 와, 와아아! 예쁘, 예쁘지? 다행이다아……. 오, 오빠한테 주려고 했는데. 헤, 헤헷! 히히힉!”

 ‘미쳤냐!’

 하얀이 양 손으로 뺨을 감싸며 즐거워했다. 소라는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캔버스에는, 크고 작은 입술들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대놓고 키스를 했다고 동네방네 자랑하는 것 같은 그림이었다. 졸지에 알고 싶지 않았던 직장 동료 커플의 스킨십 진도를 알게 되어버린 소라가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얼굴로 소리내어 웃었다.

 “남자친구 분과 참 좋은 시간을 보내셨나 봐요, 하. 하하. 하…….”

 “나, 나, 남자친구우?!”

 하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소라가 놀라서 의자를 뒤로 물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가까스로 멈춰섰다.

 “왜, 왜그러세요…?”

 “나, 남자친구라니… 아, 아닌데에……. 오, 오빠랑 난 아직.”

 “네? 키스하신 게 아니었어요?”

 “뭐어! 키, 키스?!”

 하얀이 목소리를 높였다가 제 풀에 놀라 꺄악,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뭐야, 남자친구 아니야? 그녀의 반응에 소라는 잠시 무서운 것도 잊고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입술만 잔뜩 그리셨잖아요……. 남자친구 분이랑 키스하신 거 아니었어요?”

 “아, 아니야. 소라야. 우, 우리는 아직 사귀는 사이가 아, 아닌걸!”

 하얀이 손사래를 치며 열심히 해명했다. 소라는 진지하게 그녀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아……. 저번달에 2층 둘러보러 오셨던 에이전시 분이에요?”

 “마, 맞아! 기, 기억하는구나? 으응, 우리 오빠야. 헤헤…….”

 하얀이 양 손을 깍지 껴 잡더니 몸을 배배 꼬았다. 소라는 멍한 눈으로 기억을 더듬느라 그것을 보지 못했다.

 소라가 매일같이 청소하는 화실의 2층은 작은 갤러리였다. 비정기적으로 화실 수강생들이나 실력은 있지만 아직 무명인 화가들의 작은 전시회가 열리고는 했는데, 지난달에는 어떻게 알았는지 예술산업의 신성이라 떠오르는 파란 에이전시에서 사람이 왔었다. 어디 촬영에 사용할 참신한 그림 소품을 구한다고 했었나, 그랬던 것 같았다. 소라는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떠오른 남자의 얼굴을 복구하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재킷은 입지 않은 캐주얼한 셔츠에 슬랙스 차림이었다는 것만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인사해서 사람이 좋아보인다고 잠깐 생각했던 것도 같았는데, 왠지 전체적으로 꺼림칙한 인상으로 기억에 남아있어서 이상했다. 왜지?

 “엄청…… 상냥하고, 조, 좋은 사람이야. 오빠는.”

 하얀이 배시시 미소지었다.

 “이, 있지. 내가아, 그… 그림 빼고 아무 것도 모르잖아. 음악같은 건 하, 하나도 모르구. 그, 그래서 모르는 게 되게 많았다? 그, 그래서 공연 보러 가기 전에 그, 급하게 책도 읽고 유튜브도 보고… 공부해 갔는데. 뭐였냐면, 차이코프스키…….”

 소라는 알고 싶지 않던 직장동료의 연애담을 미주알 고주알 듣는 것이 괴로웠다. 흘려 듣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자꾸 남자가 거슬렸다. 소라는 앓는 소리를 내며 그 이유를 생각해보려고 했다. 왜 자꾸 걸리지……. 열심히 남자의 칭찬을 늘어놓는 하얀의 종알거림을 배경음 삼아 기억을 되감자, 문득 하얀의 그림 앞에서 한참동안 서 있던 옆 모습이 떠올랐다. 소라는 그 날도 2층 청소를 했던 것 같다. 손님이 올 줄 몰랐던 탓에 급하게 하던 청소를 마치고 계단으로 내려가던 참이었는데, 스쳐가며 남자의 옆얼굴을 보았다. 사람 좋게 웃을 때는 미처 볼 수 없던 표정이었다. 소름이 돋을만큼 차갑고 계산적인 눈. 그 날 남자는 관심을 보이던 하얀의 그림을 한 점 구입해갔다.

 가라앉아 있던 기억을 떠올리자 어쩐지 무척 거북했다. 소라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 날도 남자가 인사를 하던 말던 하얀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제 지정석에 앉아있던 것 같은데. 언제 저렇게 푹 빠졌을까. 소라는 하얀을 흘긋 보았다가 여전히 붉어진 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적응이 안 돼. 적응이.’

 “그, 그렇게 봐 갔는데 막상 얘기를 하, 하려니까 다 까먹어버린 거 있지. 기… 기억이 뒤섞여서, 이건 저거 같고 저, 저건 이거 같구……. 그, 그래서 헷갈렸단 말이야. 무지 바보처럼 마, 말실수를 했어. 바. 바보같았을 거야. 그, 그치? 나, 나는 오빠한테 잘,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너무 소, 속상했어.”

 하얀은 그림을 봤다가, 소라를 봤다가, 고개를 숙여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오빠가 날 놀리고 깔볼까봐 겁이 났어. 그런데, 오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하얀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랬는데 오빠가, 모, 몰라도 괜찮다고 했어. 이제부터라도 배우면 된… 된다는 거야…….”

 ‘그,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는데.’

 하얀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그녀가 소라를 바라보면서 활짝 미소지었다.

 “함께 고, 공부하자고 한 거 있지? 우리 둘이 가, 같이 읽어보자구 하면서 채, 책을 사줬어!”

 “그러셨구나……. 하하. 조, 좋은 분이네요!”

 소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얀도 소리내어 웃었다.

 소라는 뺨을 긁으며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자신에게 남자가 썩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그가 딱히 나쁜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듣자하니 남자도 하얀에게도 잘 하고 있고,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단지 인상이 더럽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편견을 가졌던 것 같아서 머쓱했다. 무엇보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저렇게 나사 풀린 하얀은 으스스한 웃음소리만 빼면 이전보다 훨씬 덜 무서웠다.

 소라는 덜 공포스러운 직장생활을 하고싶었다. 보아하니 그러기 위해서는  하얀의 연애사업이 순탄해야 할 것 같았다. 소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틀림없이 그 분도 하얀 님께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여, 역시……! 그, 그렇지? 맞지이?”

 금세 기운을 찾은 하얀이 꺄꺄거리며 팔다리를 흔들었다. 소라가 주먹을 불끈 뒤며 외쳤다.

 “그럼요, 그럼요! 그러니까 먼저 고백하세요! 덮쳐버리는 거예요!”

 “뭐, 뭐, 뭐어? 그, 그건 나, 남자가 해야지!”

 “세상에. 사귀기도 전에 키스하고 싶어서 이 난리를 치셨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어요?”

 소라가 캔버스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하얀이 그런 말도 안 되는 편견을 가지고 있음에 놀란 소라는 그런 성별이분법적이고 수동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사랑을 쟁취할 수 없다며 열변을 토했다. 하얀은 자신감 넘치는 그녀의 주장에 서서히 빠져드는 것을 느꼈고, 대화를 마친 뒤에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게 되었다.

 

 기영은 모니터 우측 하단을 보았다. 일곱시 반.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하얀이 굳이 자신의 직장 근처에서 보고 싶다고 주장했던 터라 만나기로 한 곳도 사옥 근처 카페였다. 약속 장소로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찌 되었거나 가까운 곳이므로 금방 갈 수 있었기에 기영은 조금 더 업무를 보기로 했다.

 잠시 뒤 멀찍이서 어슬렁거리던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텅 빈 사무실을 휘휘 둘러본 그가 허리를 굽혀 데스크를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형님. 아니지, 팀장님! 지금 시간이 몇신데. 퇴근 안하쇼?”

 “어. 나도 이제 가려고. 수고했다, 덕구야.”

 “핫핫. 형님도 빨리 퇴근 하쇼!”

 데스크를 두드리며 재촉하던 남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나저나 정말로 정 작가님이 거, 뜰 것 같소?”

 덕구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던 기영이 손을 멈추었다. 푹신한 의자에 등을 파묻고는 빙그르 의자를 돌렸다. 양 손가락을 깍지끼고서 허벅지 위에 얹었다.

불쾌한 감각을 곤두서게 만드는 그림들이 떠올랐다. 하얀의 그림은 주로 한 사람, 혹은 하나의 신체 일부가 캔버스에 등장했다. 손이나 발.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귀. 그것들은 주로 부정적인 감정을 토대로 그려져 있었다. 보는 것 만으로도 고통으로 전신이 따끔거리는 착각이 느껴질 만큼 강렬한 색채를 가진, 파괴력 높은 작품들이었다. 그저 ‘개성있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기영은 우연히 방문한 작은 갤러리에서, 그 기분 나쁜 작품들이 걸작으로 인정받을만한 것들이라고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갤러리든 어디든, 진흙 속의 보석같은 이 작가를 먼저 발굴한 쪽이 대박이 날 것이라는 것도.

 기영은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의 손을 떠올렸다. 희고 보드라운 손이었다. 대담하게 먼저 제 손을 잡고서도 부끄러운지 자꾸만 꼼지락거리던 웃기고 귀여운 손.

 양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서 제 입술을 홀린 듯 바라보던 하얀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기영은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물었다.

 “어떨 것 같아?”

 “내가 뭐 보는 눈이 있나. 나야 그저, 형님이 뜰거다! 하면 무조건 그런갑다 하지. 형님의 안목을 믿으니까!”

 그가 커다란 주먹으로 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그 모습이 고릴라 같다고 생각한 기영이 킬킬 웃다가 자세를 바로했다. 똑바로 마주한 눈에는 예기가 어려있었다. 저런 눈을 한 기영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덕구는 침을 삼켰다.

 “정하얀은 천재야. 그것도 앞으로 더 성장할.”

 “호오오!”

 옆눈으로 시간을 확인한 기영은 자료를 정리하고 컴퓨터를 종료했다.

 “근데 말이오. 울 회사에서 화가도 관리하나? 요새 형님이 정 작가님. 영입하려구 공 많이 들이는 건 알고 있었는데 계속 궁금했다 이거요.”

 ‘영입하려고 공을 들여?’

 가방에 서류를 넣던 기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덕구를 바라보았다. 덕구는 그의 심기를 읽지 못했는지 계속 큰 소리로 떠들었다.

 “화가랑 계약한 적은 한 번도 없던 것 같아서. 딴 회사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기영이 그의 정강이에 발길질을 했다. 덕구가 아구, 하면서 주춤 물러섰다. 기영이 옷깃을 정리하며 의자를 데스크에 밀어넣었다.

 “그걸 내가 모르겠냐, 돼지 새끼야?”

 “아이구! 왜 그러는 거요! 아프오!”

 “그러면 신경 꺼. 설명해도 알아듣지도 못할 놈이.”

 전적이 없다면 자신이 최초를 만들면 된다. 거창하게 들려도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처음 하얀에게 접근한 것은 그녀의 발전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었고, 친분을 쌓아 계약에 유리해지고자 한 것이 맞았다. 분명 그랬었다. 하지만…….

 ‘그런 데… 늘 가고 싶었는데 왜, 왠지 혼자 가기 좀 그래서 못 갔거든요. 아무도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요…….’

 눈을 내리깔고서 작게 중얼거리던 목소리.

 기영은 하얀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조금은 알았다. 언젠가 계약을 하게 될지도 모를 대상을 미리 조사하는 것은 그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얀의 가정환경이나 학창시절의 생활에 대한 공식적인 정보는 몇장의 서류로 축약되어 그의 데스크탑에 저장되어 있다. 기영은 그것을 떠올렸다. 분명 처음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던 정보들은-그저 그녀를 쉽게 이용할 만한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 위한 테이터일 뿐이었던-시간이 갈수록 함부로 대하면 안되는 무언가로 변해갔다. ‘재혼 가정’,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하는 학생’…….

 그것은 보물을 얻을 수 있는 힌트도, 열쇠도 아니었다. 하얀이 겪어온 삶이었다. 그것은 측량할 수 없는 무게가 되어 가슴 위에 묵직하게 쌓였다.

 자신이 평소같지 않다는 것쯤은 알았다. 지금까지처럼 상대를 냉정하게 바라보며 가식적으로 비위를 맞춰주지 않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호구라도 된 것처럼 하얀이 잡아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괜찮았다. 자신을 올려다보며 이상한 소리로 웃는 하얀의 손을 잡고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함께 걷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녀가 바란다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선 안에서는 무엇이라도 어울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유리구슬처럼 투명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그애가 웃는다면 언제까지라도 기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편 기영이 말했다.

 “넌 내가 걜 고작 영입하려고, 이렇게 일 다 끝난 시간에 만나러 가는 것 같아? 머리가 근육으로 찬 거 아니면 생각을 해 봐.”

 “…… 뭐요, 뭐요? 그럼 정 작가님이랑 잘 되려고 그러는 거요? 헉! 누님 생기는 거요?!”

 “시끄러.”

 “악! 형님!”

 다시 한 번 덕구의 정강이를 찬 기영이 성큼성큼 사무실을 벗어났다. 덕구가 우는 소리를 하며 그를 따라나왔다. 두 사람은 사옥 앞에서 헤어졌다.

 

 사람이 많은 곳보다는 적은 곳이 좋았고,  탁 트인 곳보다는 구석진 곳이 좋았다. 혼자서 식사를 하거나 놀러 왔다는 모습을 보이면 다른 사람들이 우습게 여기는 시선을 줄 것만 같았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그만큼 타인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불안했다. 그런 까닭으로 혼자서 하는 외출을 되도록 삼가던 하얀이었으나, 오늘은 용기를 내어 멀리까지 왔다. 기영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약속장소인 카페 구석에 자리를 잡은 하얀은 목을 빼고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그를 확인한 하얀이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붕붕 손을 흔들었다.

 “오, 오빠! 여기예요!”

 기영이 그녀를 보고 빙긋 미소지었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하얀은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하얀이 그의 손을 꼭 잡고 손장난을 하듯 좌우로 살살 흔들었다.

 기영은 히죽히죽 웃는 하얀의 얼굴을 보자 짜증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어이가 없었다. 그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자 하얀도 더욱 기쁘게 웃었다.

 “아직 시간 안 됐는데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주문은?”

 “저, 저도 금방 왔어요! 헤헤, 헤……. 어, 그래서 아직 주, 주문 안 했는데.”

 “그래? 뭐 마실래?”

 고개를 돌려 메뉴판을 본 하얀이 아리송한 표정이 되었다. 처음 오는 카페라 그런지, 유난히 메뉴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 으음…… 초콜릿 들어간 거 마, 마시고 싶어요.”

 “알았어. 기다려 봐.”

 기영이 잡힌 손을 흔들었다. 하얀은 아쉬워하며 손을 놓았다. 기영이 카운터로 가서 주문을 넣는 모습이 보였다.

 하얀은 의자 옆에 세워두었던 캔버스의 옆면을 만지작거렸다. 종이로 감싸 포장된 표면이 가슬가슬했다. 며칠 전 소라에게 보여주었다가 ‘고백하고 덮쳐버려!’ 라는 조언을 듣게 되었던 그 그림이었다. 고백을 할 마음이 생기자마자 곧바로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건조하는 데 며칠이 걸린 터라 그럴 수 없었다.

 하얀은 오늘, 기영에게 이 그림을 건네주며 고백을 할 원대한 속셈이 있었다.

 ‘하, 하지만 아직 부끄러운데…….’

 몸이 절로 배배 꼬였다.

 잠시 뒤 기영이 음료를 두 잔 들고 돌아왔다. 똑같은 모카 음료 두 잔이었다. 두 사람은 각자 음료를 쪽쪽 마시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얀은 빨대를 문 기영의 입술에 시선이 절로 가는 것을 자제하려 노력했다. 동그랗게 오므라든 입술이 마치, 뽀, 뽀뽀를 하는 것처럼 보여서 여간 야하고 귀여운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물기를 머금어 반들반들하고 촉촉해 보여서, 정말이지, 원대한 계획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대로 덮쳐버릴 것만 같았다! 하얀은 치사량의 콩깍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이렇게 자제력이 없었다니……!’

 기영을 좋아하기 전에는 몰랐던 일면이었다. 그다지 화목하지 못한 재혼가정에서 자란 하얀은 새어머니와 의붓언니들 사이에서 늘 숨죽이며 바람을 삭이는 것에 익숙했다. 독립을 한 뒤에도 몸에 밴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는데.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여도 웃으면서 받아주는 기영 앞에서는, 하얀 자신에게도 낯선 모습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바로 지금처럼.

 하얀이 제 안에 사는 짐승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던 사이, 기영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기며 한숨을 쉬었다. 하얀이 눈을 반짝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그의 입술만 보였다.  하얀은 꿀꺽 침을 삼켰다.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열심히,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얀아. 뭐하고 있어.”

 하얀의 코 끝에 따뜻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하얀이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흐릿했던 시야가 점차 또렷해졌다. 눈 앞에 기영이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끌어올린 모습이었다. 그의 속눈썹은 참 길고 예뻤다. 한올 한올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제서야 하얀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테이블을 짚고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체를 기영에게 잔뜩 굽혀 얼굴을 굉장히……가까이, 마주대고 있었다는 것도. 그러니까, 하얀은 기영에게 지금 키스하기 직전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새빨갛게 달아올라 입을 뻐끔거렸다. 마녀에게 목소리를 판 인어공주도 아닌데,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기영이 두 손으로 그녀의 양 뺨을 감쌌다. 그가 낮게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기분 좋은 듯 작게 벌어진 그의 입술이 너무, 너무 가까웠다. 하얀은 더 참지 못하고 새하얗게 날아간 이성을 놓아버렸다.

 “키, 키, 키스하고 싶어요!”

 하얀이 두 눈을 꾹 감은 채 기영의 양 뺨을 붙잡고 제 쪽으로 끌어왔다. 하얀은 입술을 동그랗게 내밀고 기영의 입술에 제 것을 꾸욱 눌렀다. 순식간에 일어난 입맞춤은 키스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우악스러운 접촉이었다. 부자연스럽게 굳어 바들바들 떠는 하얀의 뺨을 덮었던 기영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는 테이블을 짚고 불편하게 선 하얀의 손을 당겨 제 좌석 쪽으로 끌어왔다. 기영의 옆에 앉게 된 하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구석자리 고른 이유가 있었네.”

 “오, 오빠! 그게 아니라, 저, 저는……,”

 “그런데 키스하고 싶다면서. 이게 키스야?”

 기영이 웃으면서 그녀에게로 입술을 내렸다. 당황이 가득한 표정으로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연 하얀의 안으로 따뜻한 것이 들어왔다. 하얀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망쳐버린 계획도 때문에 속상한 마음도, 그가 당황하거나 화를 낼까봐, 자신을 바보처럼 여길까봐 조마조마하던 마음도 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사랑해요, 저, 정말 사랑해요…….’

 속으로 하염없이 고백했다. 하얀은 기영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토록 소망하던 첫키스는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었다. 너무, 너무 달아서 울고 싶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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