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얀을 사랑하지 않을 한소라 by. 달걀(@gdiwj1233)
-하얀소라-
“조,좋아해..좋아해, 소라야..좋아,좋아하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당신은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울먹거렸다. 훌쩍이는 소리로 봐서는 아마 감정이 북받쳐 울기 시작한 것 같았다. 들썩이는 어깨가 약해 보였다. 이 대륙에 마법으로 그를 능가할 사람은 없을 정도로 강하게만 보이던 사람이 제 앞에서 이리도 연약하게 울고 있었다.
단지, 그가 자신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뱉어낸 것 때문에.
“..정하얀 님..? 우,울지 마시고..”
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신을 좋아한다며 말을 꺼낸 이를 어떻게 위로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승낙이 아닌 거절의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소라는 정하얀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한다는 의미가 지금의 정하얀과는 의미가 달랐다. 그는 정하얀을 두려워했으므로. 그리고 사랑하지 않으므로.
그는 정하얀을 무서워한다. 두려워하고 공포스러워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그에게 불안감을 느낀다. 한소라는 난감했다. 여기서 자신이 그녀를 진정시키지 못하고 거절의 의사를 밝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최소한 좋은 꼴은 못 볼 거다.
어쩌면 자신이 죽을수도- 아. 생각하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리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생각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감이 밀려왔다. 한소라는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일단 내뱉은 말을 진행시켜야 함을 깨닫고 정하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화산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걸 받아들였다면 이런 느낌일까. 정하얀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서움에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미,미안해..가,갑자기..이런 꼴,을 보,보여..서..흑,”
그는 제 얼굴을 푹 숙이며 훌쩍임을 멈추려는 듯 입을 막고 끅끅거렸다. 터져 나온 울음에 딸꾹질마저 일어나 격해진 숨을 정리하기 어려운 건지 몸이 계속해서 들썩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정하얀 님..괜찮으니까요..”
천천히 말을 고른다. 정하얀을 자극시키지 않는 단어를 하나하나 맞춰 고르고 그녀를 진정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완곡한 거절을 골랐다간 내 목이 위험하겠지. 서늘함이 목 근처를 스쳤다. 지금 당장은 아직 이라는 말을 들어 진정시켜야 했다. 그녀가 나중에 마음이 바뀌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를 놓아줄 수 있도록. 그래, 그래야만 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곤 그녀를 똑바로 마주본다.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떨어지고 있었다. 붉어진 두 눈이 나를 응시했다.
“..정하얀 님. 저는, 저는 정하얀 님을...좋아하지만. 아직 저는..정하얀 님을 그런 의미로 바라본 적이 없어요. 정하얀 님은..제 두, 둘도 없는 스승이자, 친..친구, 셨는걸요.”
나를 좋아한다 말한 그였으니, 친구라는 말을 써도 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 말을 하는 동안 머릿속이 굳어가는 느낌이었다. 손끝이 더 이상 종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해 두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그, 그래서..저는 아직, 아직 준비가 되질 않아서..”
아, 죽고싶지 않았다. 눈물을 내면 안 된다. 그것만큼은 안 되었다. 거절이 아니라, 보류처럼 들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눈물을 흘려선 안 되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나는 마지막 한 마디를 던졌다.
“..지금 말고, 나중에, 나중에 정하얀 님의 마음이 진정되고. 저 역시 지금부터 노, 노력해 볼 테니, 까. 그 때, 그 때에 대답, 대답을 제대로, 해, 해도 될, 까요..?”
전혀 맞지 않는 말. 하지만 그래도 내가 살 수 있는 마지막 끈을 조잡하게 만들어 나는 그에게 내밀었다. 나의 이 조잡한 속임수에 그가 넘어가달라는. 아, 이런 허무맹랑한 꿈을 꾸면서. 말을 뱉은 직후에야 깨달았다. 이런 조잡한 말 따위에 과연 그가 넘어올까, 답은-
“..저, 정말?...”
-..놀랍게도. 통했구나.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붉어진 눈과 흘러내린 눈물자국이 얼굴에 가득했다. 나에게 고백하며 거절을 듣는 것을 상상했는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아, 그가. 웃었다.
“그, 그럼..그럼, 나중에. 나중에..마, 말해줄, 훌쩍. 수 이, 있는 거야..?”
그가 울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 그저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언젠가, 몇 십년이 지날 미래에도 내가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단 걸 그가 알지 못하게 해야만 했지만, 일단은 지금 살았다. 그의 웃는 얼굴에 그제서야 서늘했던 목의 감촉이 사라진 기분이 들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으로 주저앉으려 하는 다리를 움직였다.
“..정하얀 님, 그러니까..일단, 지금은. 세수부터 하시는게 어, 어떠세요..? 예쁜 얼굴이 이렇게 상하셨잖아요...눈도, 울어서 아프실 거고...”
“..그, 그래. 그러자. 그래야지..”
내 말에 그가 끄덕이며, 눈물을 소매로 훔쳐내며 웃는 모습을 보였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못난 꼴을 보였다 생각하는 건지 얼굴이 다른 의미로 붉어진 것 같았다. 환하고 맑게 웃는, 그 공포스럽던 정하얀의 웃음이 왜인지 그저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 같아서. 나는 그 얼굴을 애써 무시하고 그녀를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