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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이는 언어 by. 키뿌(@qnqndirk189)

​-하얀소라-

* 798화 이전 설정 기반 주의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방 한가운데서 한소라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가슴 앞에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기도하는 자세처럼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허나 그녀의 앞에 있는 건 결코 기도를 받아줄 만한 신이 아니었다.

 

“어리석구나.”

 

안타까움과 비웃음이 한데 섞인 기묘한 말투가 방안을 울렸다. 종이로 가려져 있는 창문을 대신하여 방안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뿜는 작은 촛불이 소리에 따라 흔들렸다. 한소라의 시선은 거기에 매여있었다.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을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아직 그녀의 마음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너나 다른 인간들에 비해 전능해 보이기는 해도 난 어디까지나 악마다. 그자를 부활시키거나 다른 그릇에 옮기는 방법 같은 건 나는 물론이고 그 어떤 악마도 답을 해줄 수 없어. 그건 신조차도 불가능한 일이다.”

 

신조차 불가능한 일. 일렁거리는 촛불을 바라보고 있던 색이 다른 두 눈에 빛이 어렸다. 악마의 단호한 발언은 오히려 안심을 가져다주었다. 기대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확신을 주니 속이 다 시원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자, 그럼 아쉽지만 규칙은 규칙이니.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마. 이런 고전적인 소환법은 오랜만이기도 하고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니 소환에 응해주었다만, 세 번째도 헛되이 보낸다면 다신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 두어라.”

 

그것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눈앞에 있는 악마는 본디 한소라 혼자만의 힘만으로는 절대 소환할 수 없는 존재였다. 지금의 자리는 일종의 편법을 써서 마련한 거나 다름없었다. 한소라는 쓸모를 다 하고 바닥을 굴러다니는 책들과 종이, 빛을 잃은 마법진들을 바라보다가 굳게 다물려 있던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건, 가르쳐주실 수 있을까요.”

 

이어지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악마, 벨리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루함이 엿보이던 얼굴에 점점 묘한 미소를 번져갔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한소라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미소는 더욱 깊어졌다.

 

“한때 내 부하였던 이의 특기였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

 

 

 

“아, 안녕, 소라야.”

 

봉인이 풀린 한소라의 눈에 가장 먼저 비친 사람은 예상했던 대로 정하얀이었다. 봉인을 실행한 자가 그녀였으니 무사히 풀어줄 수 있는 사람도 그녀밖에 없는 게 당연했다.

 

“…정, 하얀, 님?”

 

봉인의 여파인지 잘 굴러가지 않는 혀끝을 억지로 움직이자 정하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그란 두 눈이 축축하게 젖어 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응, 응응. 나, 나야. 나 맞아, 소라야.”

 

익숙하다면 익숙한 우는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다음 순간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이 품 안에 안겨 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대로 넘어갈 뻔했다. 흐트러진 중심을 간신히 붙잡아 선 한소라는 조금 망설이다가 떨리는 손으로 품에 안긴 이의 등을 쓸어 내려주었다. 서러운 울음소리가 더더욱 커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자신이 봉인된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또 외신과의 전쟁은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정하얀은 한소라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쏟고 또 쏟아내며 한소라의 이름과 미안하다는 말만을 되뇌이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아마 봉인되기 전 있었던 갈등을 말하는 것이겠지. 설마 전쟁 이후로 시간이 몇 년이나 흘러갔다거나 하는 건 아니길 바랬다. 그 정도로 오래 걸리는 전쟁이었더라면 진작에 봉인이 풀리고 전력으로 투입되었을 거다. 올라오는 불안감을 누르며 정하얀의 울음이 그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었다. 밀어낸다는 선택지는 한소라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끄윽, 끄윽, 모, 몸은, 어, 어, 어때? 내가 봉인되어있는 동안, 소라 몸의 시, 시간이, 흘러가지 않게, 했는데.”

“아…네…괜찮아요. 푹 자다가 일어난 거 같아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하얀의 말대로 한소라의 시간은 거의 흘러가지 않았다. 나무에게 삼켜지던 감각과 자신을 봉인시키는 주문을 쉴 새 없이 외우던 정하얀의 모습이 방금 본 것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그 옆에 서 있던, 자신을 이렇게 만든 원흉이 되는 인물의 모습까지도.

 

사전동의 하나 없이 얼떨결에 봉인을 당했을 당시에는 그 남자에게 또 이용당했다는 생각에 억울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잘된 일이기도 했다. 안전한 후방에 선다고 해도 전쟁은 전쟁. 쓸 수 있는 마력의 양도 많지 않은 데다가 신체적인 핸디캡을 안고 있는 한소라는 전쟁에 나가봤자 고생만 할 게 훤했다.

 

다만 품에서 좀처럼 나올 생각이 없는 이 사람이 자신이 없는 동안 얼마나 무리를 했을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가장 강력한 아군의 한 축인 만큼 그 남자가 챙겨주었을 거란 추측은 했다. 그는 정하얀을 나름대로 아끼고 귀여워하기도 했으니. 그것이 정하얀이 바라는 것과는 다른 게 문제지만 말이다.

 

“정하얀님 덕분에 제가 살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한소라는 여전히 정하얀의 등을 쓰다듬는 걸 멈추지 않고 있었다. 반복해서 귓가에 감사의 말을 중얼거리고 나서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울음소리가 점차 가라앉아갔다. 정하얀이 고개를 들자 한참 울어서 피부는 빨갛게 익어 있었고, 두 눈덩이는 퉁퉁 부어올랐다. 이 또한 아주 익숙한 광경이었다. 정하얀은 자신의 등을 쓰다듬어 주던 한소라의 손을 조심스럽게 이끌어 제 뺨을 갖다 댔다.

 

“나도. 나도 소라가 이렇게 살아줘서, 고마워.”

 

한소라는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가까운 정하얀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올라간 입꼬리는 분명 정하얀이 굉장히 이쁘게 웃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소리 내어 울던 모습보다 훨씬 슬퍼 보이는 것 같았다. 역시 전쟁에서 무슨 일을 겪으신 게 아닐까? 내가 옆에 있었으면 이런 표정을 짓는 일이 없었을지도 몰라. 한소라는 저도 모르게 입안의 여린 살을 씹었다. 부길드마스터는 지금 뭘 하고 계신 거지. 알고 있는 게 없으니 정하얀이 듣고 기뻐할 만한 말이 무엇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제 봉인이 풀렸다는 건 즉―”

 

바깥 상황에 대한 말을 꺼내려고 하기 무섭게 굳어지는 표정에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려는 데 굳어 있던 정하얀이 먼저 말을 꺼냈다.

 

“소, 소라는 지금, 많이, 아주 많이 피곤할 거야. 그, 그렇지?”

“네?”

“봉인되었다가 깨어났잖아. 나, 이런 마법은, 너, 너 말고 해본 적이 없어서, 호, 혹시라도 어떤 부작용이 있다거나, 할 수도 있어. 그, 그, 그 여자, 박미진의 힘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나,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아….”

“그러니까 오늘은,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푹 쉬어. 알았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처럼 몰아붙이는 말투. 괜찮다고 말해 봤자 소용이 없어 보이는 분위기에 한소라는 결국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

 

 

 

정하얀은 방금까지 펑펑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기민하게 움직였다. 먼저 주춤거리던 한소라를 이끌고 마탑에 마련되어 있던 한소라의 방으로 바로 이동했다. 파란 소속이지만 정하얀을 따라 마도 길드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기에 마련된 공간이었다. 흑마법 수련과 관련된 책자와 정하얀을 위해 만드는 것들의 재료들을 항상 깔끔하게 정리를 해두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낯선 책들과 마법 연구에 쓰이는 기구들이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누군가가 이 방에 오래 머문 것 같다는 걸 깨닫기 전에 몸이 먼저 침대 위에 눕혀졌다. 당연히 이 또한 정하얀의 짓이었다.

 

이후 둘 사이에 아주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간단한 진단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정하얀으로 하여금 한소라를 봉인하도록 만들었던 이질적인 힘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처음부터 그런 이상한 힘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나, 다행이라고 또다시 눈물을 보이는 정하얀에게 차마 알려줄 순 없었다. 봉인이 풀린 직후보다 더 서럽게 우는 것처럼 보이던 정하얀은 창밖의 해가 다 떨어질 동안 쭉 곁에 있어 주었다. 두 사람은 중간에 간단한 식사를 함께 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쭉 손을 잡고 있었다. 이러다 아예 잠까지 함께 자는 게 아닐까 싶은 걱정이 들 때 즈음, 정하얀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만 가볼게. 소라는 일어나지 말고 혼자서 잠이라도 자고 있어. 피곤할, 테니까.”

“아, 네. 정하얀님도, 쉬러 가시는 거죠?”

“…응. 그렇지.”

 

정하얀은 내려간 이불을 다시 한소라의 몸 위로 덮어주었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제지하는 손길이 있어 다시 누울 수밖에 없었다. 한소라의 상태가 안 좋은 구석이 전혀 없다는 걸 본인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하얀은 그녀를 시종일관 환자로 대했다. 어쩌다 보니 일방적으로 보살핌을 받게 되자 평상시의 관계가 역전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정작 정하얀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무리하지 말고, 푹 쉬고 있어.”

 

작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정하얀의 손이 이마를 향해 뻗어왔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기라도 하려는 걸까? 환자가 아니라 어린애 취급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먼저 눈을 감으려던 한소라의 시야에 다가오는 손가락 끝이 아주 희미한 빛을 머금은 게 보였다. 빛. 그것은 저 손끝이 마력을 품고 있다는 증거였다.

 

어? 어어? 예고도 없이 닥친 상황이었지만 한소라는 침착하게 손가락이 닿기 직전 해제 주문을 외웠다. 물론 입 밖으로 소리 내지는 않았다. 정하얀의 마법은 한소라의 작은 그릇 따윈 아득히 뛰어넘었었기에 전부 막을 순 없지만, 지금처럼 적은 마력으로 발동한 마법이라면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었다. 정황상 수면 마법을 거는 것 같아 손이 닿은 직후 마법에 걸린 척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다행히 틀린 답은 아니었는지 정하얀으로부터 이상한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잘자, 소라야.”

 

그렇게 말한 뒤로도 정하얀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정하얀의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으로 열심히 자는 모습을 연기했다. 몇 분이 지난 뒤에야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가까이 있던 인기척이 사라진 걸 알 수 있었다. 한소라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정하얀이 마법을 쓰면서까지 자신을 재우려는 이유는 대체 뭘까.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은 마탑 안에 있는 방이다. 길드원들 모두가 사용하는 공용공간의 일부인 만큼 방음 마법을 따로 펼치지 않는 이상 생활 소음이 어느 정도 있는 게 일상인 장소다. 특히 지금과 같은 전쟁 이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면 더 큰 소리가 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잠시 열렸던 문밖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소리가 없으니 인기척이 없는 것 같다. 종합적으로 볼 때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길드도 그렇고, 정하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이쯤 되자 한소라는 가만히 누워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봉인이 풀렸으니 당연히 전쟁 또한 끝난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지금도 진행 중인 걸 수도 있다. 아니면 정하얀을 비롯한 몇몇 영웅들을 제외하고는 외신에 의해 떼죽음을 맞이했다거나? 그런 미래만은 꼭 피하고 싶은데.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던 한소라의 머릿속에 자신의 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던 정하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하얀을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건 이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다.

 

부길드마스터. 서둘러 퀘스트창을 살펴보았다. 텅 비어있는 퀘스트창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에 확신을 주고 있었다. 소지품을 확인하자 다행히 봉인될 당시까지 지니고 있던 여신의 거울을 찾을 수 있었다. 화면 또한 무리 없이 작동했다. 빠르게 베니고어넷에 접속하자 모두가 한가지 화제로만 떠들고 있는 게 보였다. 한소라가 찾던 것이자 제발 아니기만을 바랐던 일이었다.

 

명예추기경 사망.

이기영 죽음.

물러간 외신.

이기영 명예추기경을 향한 애도의 물결.

노을빛 신의 탄생.

숨을 거둔 베니고어의 아들.

희망과 절망의 늪에 빠진 대륙.

 

스크롤을 넘기고 또 넘겨도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었으며 새로운 글들 또한 끊임없이 올라왔다. 시끄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수많은 글자들이 베니고어넷을 뒤덮고 있었다. 접속인구가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여신의 거울을 사용하는 대륙인들이 전부 한꺼번에 모여서 글을 올리고 있다고 해도 충분히 믿어질 만한 화력이었다. 거기에 이번 전쟁에 대한 정리글도 셀 수없이 많았기에 짧은 시간 안에 외신과의 전쟁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현재 파란의 길드원들은 부길드마스터의 죽음으로 인해 충격과 비탄에 빠져있으면서도 전쟁의  뒤처리를 하느라 외부에서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인지도가 있는 길드원들의 경우 각자 어떤 장소에서 무슨 활동을 펼치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가 되고 있었다.

 

“하, 하하…하…….”

 

고단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길드원들의 모습들을 쭉 읽어 내려가고 있으면서도 한소라는 이기영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이기영의 실체를 잘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악마 소환 건으로 전 대륙인들을 속여넘긴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자기 자신의 죽음마저도 이용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화면을 넘기는 속도는 점차 빨라졌다. 글은 중요하지 않았다. 글이란 누구든지 쉽게 조작할 수 있는 수단이다. 확실한 증거. 이기영의 죽음이 사실인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필요했다.

 

한참 동안 살펴보던 끝에 게시글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나 잔혹하다는 이유로 이용자들이 올리기를 꺼리는 와중에, 대륙민들 모두가 그의 마지막을 알아야 한다면서 올라온 글이었다. 망설임 없이 제목을 누르자 여러 각도에서 촬영된 것 같은 사진들이 화면 가득 비쳤다. 오열하고 있는 길드마스터. 그런 그의 앞에 있는 부길드마스터가, 피웅덩이 속에서 잠자듯이 누워있었다. 누가 봐도 죽은 자임을 알 수 있는 창백한 피부인 채로.

 

“……웃, 우, 우엑. 윽…!”

 

한소라는 황급히 구역질이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손에서 힘없이 떨어진 여신의 거울은 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미처 끄지 못한 화면에서는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의 양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라고 믿고 싶어도 그가 흘린 피와 울고 있던 길드마스터의 모습이 이것이 현실임을 깨닫게 했다.

 

“으윽…….”

 

배를 감싸 쥔 채로 주저앉은 한소라는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정하얀은 이 사실을 알고 있겠지. 부길드마스터가, 이기영이 죽었다는 사실을. 그 여자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한소라는 정하얀이 이기영을 대상으로 얼마나 많은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옆에 붙어 있으면서 지켜줄 수 없는 전쟁을 앞두고 위대한 마법사는 사랑해 마지않는 약혼자의 몸 상태를 알 수 있도록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해두었을 것이다. 그의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 정하얀에게 얼마나 많은 경고음이 갔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럼 방금까지 자신과 함께 있었던 정하얀은 뭐였을까. 하염없이 울고 있다가도 간혹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어 주었던 사람은 분명 정하얀이 맞았다. 이기영이 죽은 그 순간부터 미쳐있을 게 틀림없는, 반드시 되살리겠다면서 차갑게 식은 몸을 끌어안은 채 몇 날을 버티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어째서 이기영의 곁이 아니라 여기에서 웃고 있을 수 있던 걸까.

 

‘이제, 정말로, 안심이야. 소라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나는, 나는….’

 

한소라의 상태를 확인한 순간 정하얀이 그런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었다. 한소라의 봉인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거다. 그녀만이 풀 수 있는 봉인이 풀렸고, 한소라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다음에 정하얀이 취할 행동은 무엇일까.

 

삐걱삐걱 머리가 굴러가는 것과 동시에 한소라는 튕기듯이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정하얀의 방은 마탑의 꼭대기에 마련되어 있었다. 계단 몇 개만 오르면 되는 그 짧은 거리가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다.

 

굳게 닫혀있는 것처럼 보이던 문은 한소라의 힘만으로 의외로 쉽게 열렸다. 방안의 창문도 닫혀 있지 않았는지 큰바람이 불어와 얼굴에 부딪혔다. 방해되는 머리카락을 걷은 한소라는 자신의 앞에 있는 광경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공중에서 커텐처럼 나부끼는 새하얀 천자락이 보였다. 그 아래로 두 다리가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

 

 

 

“―얀아. 하얀아?”

“어?”

 

멍한 소리를 내며 두 눈을 깜빡이자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는 이기영이 보였다. 오빠가 왜 여기에 있어? 정하얀은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입을 열기 전에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이는 카페의 광경이 보였다. 혼자서 공부를 하고 있거나 일행과 떠들고 있는 모습들을 빠르게 훑어본 정하얀의 시선이 다시 맞은편에 있는 상대에게로 돌아왔다. 이기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있어?”

“아, 아뇨.”

“오랜만에 만났다고 일부러 무리할 건 없어. 피곤하면 말해. 응?”

 

이기영의 손이 테이블에 올려진 정하얀의 손 위로 올라왔다. 다정하게 겹쳐진 두 사람의 손가락에는 비슷한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고른 반지였다.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정하얀은 곧 시선을 다시 위로 올렸다.

 

“그냥 주, 주변 소리에 좀 멍해져 있었을 뿐이에요. 아, 아, 아무렇지 않아요.”

“그럼 다행이고.”

 

이기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수 넘겨주었다. 연인 사이라면 충분히 할법한 작은 접촉이었으나 정하얀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내일이 드디어 우리 소풍 가기로 한 날이잖아. 그날 뭘 할지 생각해놨어?”

“소풍, 이요?”

“응. 중간 끝나면 가기로 했었잖아. 기억 안 나?”

“아, 아뇨. 기억나요. 고, 공원. 공원으로 가기로 했었잖아요.”

“맞아. 네가 가고 싶다고 먼저 말했었잖아.”

 

먼저 말했다고? 정하얀은 또 가슴이 술렁거리는 느낌에 침을 삼켰다.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라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곧바로 예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동기의 SNS에서 보았던 넓고 아름다웠던 공원의 사진이. 정하얀은 그걸 보고 이기영에게 함께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중간시험이 시작하기 전에. 그 사실을 떠올리자 기분 나쁜 감각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그날 차도 가져갈 거야. 현성이가 빌려주기로 했거든. 전에 얘기한 적 있지? 우리 과 후배. 그리고 이건 덕구 녀석이 말해준 건데 공원 근처에 꽤 괜찮은 장소가―”

 

이기영의 말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이어졌다. 잡혀있는 손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땀이라도 차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들었지만 그런 마음을 다 읽고 있는 건지 이기영이 때때로 움직여서 겹쳐 쥔 손의 위치를 조정했다. 정하얀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자기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의 손을 깍지껴 쥐었다.

 

같은 과의 몇몇 사람들하고만 아는 사이인 정하얀과 달리 이기영은 총학생회에 소속되어 있을 정도로 대학 내의 인맥이 넓은 사람이었다. 항상 남을 챙겨주고 궂은일도 척척 해내서 같은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이기영이라는 인물을 동경했다. 정하얀이 신입생 시절 소문이 안 좋은 선배에게 걸리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을 때도 가장 먼저 도움의 손길을 뻗은 것도 이기영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정하얀의 마음속에서 생활해왔다.

 

동기들과 함께 꾸준히 교류를 이어나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몰래 둘이서만 빠져나가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다 분위기 좋은 장소에서 고백을 받고, 첫 데이트를 하고, 너무나 예쁜 반지를 서로에게 끼워줄 때까지. 이기영을 만난 이후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다. 마치 매일매일 꿈속에서 사는 것처럼 달콤하고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내일 아침에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네. 저 도, 도시락도 싸, 싸갈게요. 헤헤.”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라 그런지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다. 이기영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찾아간 공원은 사진으로 봤을 때와 똑같이 아름다웠다. 잘 꾸며진 산책길을 손을 잡고 걸어 다니면서 둘은 여느 커플과 다를 바 없이 사진도 잔뜩 찍었다.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많이 웃었다. 도심에서 하는 데이트도 즐거웠지만 이렇게 조용한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지루하지 않았다. 애초에 정하얀은 이기영과 함께라면 어디든 웃으면서 걸어갈 자신이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넓은 공원을 다 돌아본 다음에는 미리 점찍어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하얀이 정성을 다해 만든 도시락은 걸어 다니느라 출출해진 두 사람에 의해 빠르게 비워졌다. 한결 가벼워진 가방을 한쪽에 몰아넣고 나자 둘은 자연스럽게 자리 위로 나란히 눕게 되었다.

 

그늘 아래에서 바라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거기에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는 자장가나 다름없었다. 새벽부터 오빠와 함께 먹을 도시락을 만드느라 고생했던 정하얀의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잠깐 눈 붙이고 있어. 이따 깨워줄 테니까.”

“아, 하지만 자는 건 좀….”

“괜찮아. 오빠가 옆에서 지켜주고 있을게.”

 

이기영은 언제나 정하얀이 듣고 싶은 말을 골라서 말해주었다. 때로는 그 상냥함이 너무나 좋아서, 모든 걸 다 버리고 거기에만 매달리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저, 저 아까부터 꼭 하고 싶은 말 하나가 있어요.”

“응, 뭔데?”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고마워요.”

“응? 뭐가?”

 

이 세계는 진짜가 아니니까.

 

“정말로 고마워, 소라야.”

 

웃고 있던 이기영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맑은 하늘에서는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

 

 

 

벨리알이 준 지식으로 만들어낸 이 세계는 잠든 정하얀의 꿈을 양분 삼아서 만들어진 것이다. 즉 온전히 한소라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 정하얀이 꾸고 있던 꿈속으로 들어가 환경을 개조해서 재창작을 한 것에 가까웠다. 다만 이 마법은 이 세계가 꿈이라는 걸 인식하고 이 공간을 만들어낸 설계자를 찾아내는 순간부터 깨질 수 있는 구조였다. 얼핏 들어보면 그렇게 까다로운 조건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겪어보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계자가 대상자의 정신을 이 만들어진 꿈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설계자는 대상자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여주면서 현실보다 꿈꾸는 시간을 더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게 만들고, 서서히 꿈속의 세계와 융화되어 가는 게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하지만 정하얀은 이 세계가 꿈이라는 걸 완벽하게 인지했음은 물론이고 설계자인 한소라가 숨어있는 장소마저 찾아냈다. 어떻게, 라는 뻔한 말은 구태여 꺼내지 않았다. 같은 인간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는 재능을 소유한 마법사의 앞에서 이 연극 아닌 연극이 며칠이나 갈 수 있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정하얀님, 왜 그러셨어요?”

 

덧씌웠던 이기영의 껍데기가 사라지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한소라가 날이 선 투로 물었다. 서럽게 일그러져 있는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어서 정하얀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한소라가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눈치채셨겠지만, 이건 현실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는 순간 깨지는 꿈이에요. 다시는 이런 걸 겪을 수도 없고, 보실 수도 없다고요.”

“응. 아, 아, 알고 있었어.”

 

한소라의 말이 맞았다. 겪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게 당연했다. 이기영도 정하얀도 평범한 대학생하고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으니 이 꿈은 존재하지 않는 망상이나 다를 바 없다. 심지어 정하얀은 이곳에서 평화롭게 하룻밤을 보낸 뒤였다. 시간이 흐른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세계. 외신도 전쟁도 연적도 없이 이기영을 독차지할 수 있는 세계. 이곳은 정하얀이 항상 꿈꿔왔던 세계 그 자체였다. 그러나 정하얀은 단호했다.

 

“계,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어. 나가야지.”

“이 세계는 제가 설계했어요. 무너지는 걸 막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그것 때문만은 아, 아니야. 나는 현실로, 오빠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해.”

“돌아가면, 어떻게 하시려구요? 부길드마스터가 어떤 상태인지 아시잖아요.”

 

정하얀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표정은 말할 것도 없이 어두웠다. 한소라는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여기에 있어요. 저도 같이 있을게요.”

 

대상자를 묶어놓기 위해서 설계자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 법은 없었다. 대상자가 꿈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설계자가 끊임없이 정신을 주무를 일도 생기지 않을 테니. 하지만 한소라가 없을 때의 정하얀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기에, 한소라는 그녀를 홀로 놔둘 수가 없었다.

 

“이 세계는 슬퍼할 일은 없어요. 모든 것들이 정하얀님을 위해서 움직이겠죠. 정하얀님이 그런, 그런 행동을. 하게 될 정도로, 슬픈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무슨 정신으로 목을 맨 정하얀을 끌어내렸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말 다행히도 마탑에 치료 마법을 쓸 줄 아는 어르신이 한 분이라도 계셨기에 정하얀은 무사히 살 수 있었다. 만약 한소라가 찾아간 시간이 단 몇 분이라도 늦었더라면 무슨 일이 있었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미, 미, 미안해….”

 

토해내듯이 소리치는 한소라의 앞에서 정하얀은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박미진 일에 이어 또다시 한소라를 외면하고 벌인 결과가 이것이었다. 몇 번을 사과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나, 나는 오빠가 주, 주,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게 무슨….”

“들렸는걸. 오빠의 모, 모, 목소리가.”

 

발밑의 지지대를 차버리자 들려왔던 소리가 하나 있었다.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고, 또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아서 뚝뚝 끊어지는 소리였지만 정하얀은 그것이 사랑하는 오빠임을 알 수 있었다.

 

“오, 오, 오빠는 분명 나를 보고 있었어.”

 

어떻게 그 소리가 들려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정신적인 한계에 몰려서 들려온 환청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걸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서라도 정하얀은 이곳에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현실로 돌아가야만 했다. 미쳤다고 할 수도 있는 이야기였으나 한소라는 묵묵히 다 들어주었다.

 

“나는 여기에 머, 머무를 수 없어,”

 

정하얀의 표정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데서 비롯된 슬픔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이기영이 현재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알아내겠다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이기영의 죽음을 완전히 극복했다곤 말하기 어려웠지만, 새로운 목표를 얻은 그녀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 나가자, 소라야.”

“……….”

 

그 말을 거절할 명분은 더이상 한소라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한소라는 정하얀이 한번 목표를 세운 이상 반드시 달성할 거란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대신, 그런 짓은. 다신 하지 말아요. 또 그랬다간 여기로 데려올 거니까.”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정교한 세계를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한소라는 올라오려는 울음을 꾹 참았다.

 

 

 

*

 

 

 

“어, 얼른 나가지 않으면 저, 정말로 나가기 어려울지도 몰라.”

 

금이 점점 더 넓게 퍼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정하얀이 말했다. 그 말대로 이대로 있다간 무너지는 세계에 깔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 저, 사실은.”

 

한참 전부터 할 말이 있는 듯이 줄곧 안절부절한 상태에 있던 한소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까부터 나가려고 시도를 하는 중인데, 이상하게 열리지 않아요….”

“서, 설계자는 소라잖아? 호, 호, 혹시 다른 사람하고 함께 했다거나―”

“아, 아뇨. 주문을 외운 건 분명 저 혼자지만 사실 제대로 연구를 거친 게 아니라 그…빌린 거에 가까워서.”

“으응, 하긴 소라 호, 혼자서 이런 저, 저, 정교한 마법을 만드는 건 힘들겠지. 어쩔 수 없네. 내가 한번 풀어볼게.”

 

누구에게 빌렸는지 캐묻지는 않을까 불안했던 것과 달리 정하얀은 말없이 금이 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곧 망설임 없이 복잡한 주문들을 연이어 중얼거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천재 마법사다웠다. 지금 같은 모습을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정하얀은 진정으로 마법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낼 수 있을 거라고 한소라는 믿고 있다. 그것은 마법사 정하얀이라는 존재를 두려우면서도 존경하게 되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아, 맞다.”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정하얀은 손뼉을 쳤다.

 

“나, 나 이거랑 비슷한 마법을 예, 예전에 연구해본 적이 있었거든. 그거랑 이거랑 접목시켜 보면 구조를 바꾸는 게 가능할지도 몰라!”

 

답을 찾아낸 기쁨에 정하얀은 자신이 생각해낸 방법에 대해 온갖 마법 용어들을 쏟아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한소라의 능력으로는 절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다 알아듣는 척 열심히 설명을 들어주자 정하얀은 의욕적으로 주문을 외워댔다. 그녀가 지닌 어마어마한 마력들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정하얀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던 돌멩이들까지도 마력의 영향으로 인해 공중으로 떠올랐다.

 

“먼, 저, 내 지팡이를.”

 

정하얀이 팔을 뻗기 무섭게 지팡이가 손에 쥐어져 있었다. 진짜 지팡이는 치료를 받고 누워있는 정하얀의 옆에 얌전히 보관되어 있다. 가짜를 굳이 만들어내는 건 몸에 각인된 힘이 지팡이가 있어야만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칠 수 있어서겠지.

 

“다, 다음은 공간을 지배하고.”

 

지팡이를 휘두를 때마다 주변에 있던 사물과 인물들이 하나씩 지워져 갔다. 그 자리에 처음부터 없었던 것과 같은 깔끔한 처리였다. 얼마 가지 않아 정하얀과 한소라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단계가 있, 아―”

 

열심히 설명들을 늘어놓으면서 환상으로 만들어진 세계를 해체하고 있던 정하얀은 갑자기 작업을 중단했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머리를 쥐고 내려놓거나, 얼굴을 가리고 끙끙대기 시작했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한소라와 눈이 마주치자 커다란 고민을 안고 있는 것 같았던 정하얀의 표정은 뭔가를 결심한 것처럼 바뀌었다. 이어 한 걸음씩 다가오는 모습에 한소라는 뒷걸음질 치고 싶은 기분을 애써 눌러 담아야 했다. 한쪽의 일방적인 접근으로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더니 어느새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미, 미, 미안.”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사과부터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묻기 위해 말을 꺼내려는데, 그보다 보드라운 뭔가가 입술에 닿는 게 먼저였다. 그것이 맞은 편에 있는 사람의 입술이라는 걸 한소라가 깨닫는 순간. 커다란 굉음과 함께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

 

 

 

정하얀의 변명을 정리해보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예전에 오, 오빠가 깨어나지 못하고 자, 자고 있을 때, 연구했었거든. 상대방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마법을.”

 

자칫 잘못하면 두 사람의 정신이 섞일 수 있는 부작용이 있어서 연구를 중단했지만 대신 꿈에서부터 빠져나오는 마법만큼은 만들기가 간단했다고 한다. 예의 마지막 단계는 잠자는 사람을 깨우는 마법이라고 생각하니 그게 가장 먼저 떠올랐다면서 별 고민도 없이 정해두었다고, 정하얀은 쑥스럽다는 듯이 고백해왔다. 정하얀이 떠올릴 법한 충분히 동화적이고 로맨틱한 해제 방법이었다. 한소라는 지금 방 안이 매우 어두운 상태라는 것에 감사하며 이마를 짚었다.

 

한소라가 만들어낸 세계이자 정하얀의 꿈 속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대상자와 설계자가 한 장소에 나란히 누워있을 것. 처음 마법을 발동시키는 조건 중 하나였다. 정하얀은 자신의 방 전체에 그려진 마법진이 거슬리지도 않는 건지 역시 소라가 그린 건 깔끔하고 예쁘다는 칭찬을 하며 관찰하기 바빴다.

 

“저기, 저기이, 소라야. 이, 있잖아.”

“네, 정하얀님.”

 

천장 위에 그려진 마법진을 쳐다보고 있던 정하얀이 갑자기 손가락만을 꼼지락거리며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설마 마법의 영향이 남아 있나 싶어서 옆으로 조금 다가가자 정하얀이 얼른 팔을 감싸 안으며 몸을 겹쳐왔다. 간질거리는 숨결이 뺨에 닿아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정하얀의 조심스러운 속삭임이 귓가에서 바로 들려왔다.

 

“오, 오빠에게는 아까 있었던 일, 비밀이다?”

 

비밀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좋았는지 정하얀의 얼굴에서는 장난스러운 빛이 피어났다. 베시시 웃고 있는 표정에서는 더 이상 슬퍼하는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 한소라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떨구었다.

 

대체 뭘 비밀로 하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내가 꿈속에서 영원히 함께 있자고 했던 걸 말하는 거야 아니면 나에게 입 맞췄던 일을 말하는 거야? 그 어느 쪽도 이기영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았다. 현실 세계가 꿈속 세계처럼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비밀로 할 생각이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내려오는 지끈거리는 아픔에 눈을 감았다. 눈앞이 빙빙 도는 게 무리해서 발동한 마법으로 인한 마력 탈진 현상이 틀림없다. 따라서 가슴 안쪽에서 울리고 있는 심장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한소라는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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