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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 by. (@ssyum_panso)

-희라지혜-

“차희라를 공격해요."

붉은 용병 하나가 차희라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차희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검을 잡고 튕겨냈다. 이미 예상하고 있는 바였지만 짜증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지혜는 이 모든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안 그래도 일에 치이는데 일거리를 밀어주는 제 파트너도 짜증스러웠고 차희라에 의해 움직이는 이 판도 그랬다.

무엇보다 차희라라는 인간 자체가 거북했다. 그 붉은 머리가 싫었고, 마찬가지로 붉은 눈도 피하고 싶었다. 너 따위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낯짝은 아주 갈아버리고 싶었다. 이지혜는 차희라 옆에 앉아 아양이나 떠는 이기영에게 짜증을 내고 문을 나섰다. 어쨌거나 일은 해야 했다. 안 죽으려면 해내야지. 이지혜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

외신은 격퇴했다. 이후에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선량한 이지혜는 악마에게 조종당하느라 아무것도 몰랐다는 설정이었고, 결론적으로 이기영은 대륙을 관리하는 신이 되고, 김현성이나 다른 떨거지들도 신이 되었으니 잘된거 아닌가?

“이기영 그 미친 컨트롤프릭이 결국 대륙을 지배해버리네…….”

실질적인 업무는 천사들과 베니고어, 벨리알이 한다고 하더라도 최종적인 결정은 이기영이 내린다. 그리고 이기영은 자기 일을 남에게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 결과로 한낱 인간인 이지혜가 팔자에도 없는 대륙관리 업무를 처리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영혼의 단짝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게다가 그때에도 업무에 치일 것이 뻔히 보이는 상황. 이지혜는 순간 다 포기하고 날라버릴까 하는 충동에 휩싸였다.

“아니지, 아니지……. 내가 이 자지에 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일 좀 힘들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이지혜는 다시 서류 더미에 집중하기로 했다. 외신전쟁 전후처리에 이지혜를 지배했던 악마가 벌인 일도 수습해야 하고, 길드 업무도 처리해야 한다. 외신전쟁 뒤처리는 이기영과 이지혜 두 사람이 빠졌다고 제대로 수습된 게 하나도 없었고, 백조 길드 내부의 정세도 심상치 않았다.

-쾅

“깜짝이야! 무슨 일이야? 내 집무실에 들어올 때는 조용히…. 용병 여왕님?”

“안녕?”

“……… 안녕하세요, 붉은 용병 단장님.”

이지혜는 갑작스러운 일에 굳어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인사했다. 차희라를 만날 일이 있었나? 적어도 정해진 일정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 사람이 여기 왜 왔지? 이지혜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아아, 긴장하지 마. 별일 아니니까."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차희라는 강자였다. 언제든지 이지혜를 죽일 수 있는.

“정말로 별거 아니라니까? 그냥 전쟁 때 우리 애들 신경 써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러 왔어. 여기 선물.”

차희라가 긴 상자를 꺼내 이지혜의 책상에 올려두었다. 상자는 선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포장지와 리본에 싸여있었다. 용병 여왕은 제 식구들을 아낀다지. 그 연장선인가. 이지혜는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그 상자를 바라보았다. 크기를 보아하니 와인이었다. 오랜 기간 기름칠을 해오며 키워온 나름의 감별안이 선물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이지혜는 영업용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쁘지 않았다. 그 개고생을 해서 붉은 용병들을 살려놓은 결과가 여기에 나타났다. 붉은 용병과 차희라의 호의. 큰 사건이었으니만큼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를 기반으로 입지를 키울수 있겠지.

"수고했어. 너 꽤 유능하구나?"

수고했어. 너 꽤 유능하구나? 차희라의 말이 이지혜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차희라의 얼굴은 태연했다. 악의 한 점 없이, 순수하게 이지혜의 능력을 칭찬했다. 아마 머릿속에서 이지혜의 평가를 상향 조정했겠지. 나쁘지. 나름의 호의를 담은 말일 테다.

“거래였으니까요.”

이지혜가 책상 아래에서 손을 움켜쥐었다. 저따위 말을 듣기 위해 그 개고생을 한 게 아니다. 댁의 칭찬 따위를 듣기 위해 한 일이 아니야. 그때 이지혜는 용병 여왕과 거래를 했다. 이기영이 멋대로 시작한 것에 말려든 것에 가깝지만 그것은 엄연한 거래였다. 이지혜는 차희라의 아랫사람이 아니었고 차희라는 이지혜의 윗사람이 아니었다. 본신의 무력이 어땠든 그들은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한 것이다. 차희라 따위가 자신의 윗사람인양 칭찬하고 적선하듯 와인을 받기를 바란 게 아니었다.

“아, 그랬지. 실례했어.”

차희라는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짐승 같은 여자는 이지혜가 말하는 바를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과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뭐 어쩔거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용병여왕님의 찬사, 감사하게 듣죠.”

이지혜는 와인임이 분명한 선물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런 모습이 의외였는지, 차희라는 강한 맹수가 약한 먹잇감을 내려다보듯 눈을 빛내며 이지혜를 관찰했다. 이지혜는 그 불쾌하고 끔찍한 눈빛을 참아넘겼다. 몇 마디 쓸데없는 말이 오간 후, 차희라는 이만 가봐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이지혜는 차희라가 남기고 간 선물을 쏘아보다가 하연수를 불렀다.

“연수야, 저것 좀 치워버려.”

“용병 여왕님이 주신 선물 아닌가요?”

“선물은 무슨, 하사품이야. 기분 나쁘니까 대충 던져둬.”

이지혜는 하연수가 선물을 들고 가는 것을 보다가, 다시 서류에 머리를 박았다. 저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쓸 시간 따위 없었다.

*

그날 이후 차희라는 하루가 멀다고 검은 백조에 드나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지혜를 찾아왔다. 멋대로 집무실에 쳐들어와 손님용 소파에 앉아 차를 요구하고는, 정작 차는 입에 대지도 않은 채 시시껄렁한 얘기만 지껄이다가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오늘도 오셨네요.”

“할 일이 없어서 말이지.”

붉은 용병의 수장이 할 일이 없을 리 없었다. 이제 막 평화가 자리 잡으려고 하는 지금 시점에서는 더욱더. 차희라는 이지혜의 시선을 무시하며 오늘도 집무실 테이블에 앉아 차를 요구했다.

“오늘은 홍차로.”

“연수야, 홍차 두 잔만 타와.”

하연수가 나가자 이지혜는 차희라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신가요, 용병 여왕님?”

“그냥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좀 하자고?”

대륙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인간이 이지혜였다. 심지어 이기영의 업무를 보조하면서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들도 알았다.

“그러시군요.”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영양가 없는 말들을 이지혜는 웃으면서 응대했다. 현재 밀려있는 서류들을 생각하면 이따위 대화에 쓸 시간은 없었지만, 이지혜는 조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제멋대로인 권력자를 대하는 일은 신물 날 정도로 익숙한 일이었다.

“너 진짜 마음에 든다.”

“어머, 용병 여왕님의 마음에 들었다니 영광이네요.”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차희라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는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 말은 이지혜가 정말로 차희라의 마음에 들었다는 뜻일 것이다. 아마 지난 한 달간 이지혜가 차희라의 비위를 맞추며 바란 것보다 조금 더. 이지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너, 붉은 용병으로 전향할 생각은 없어?”

‘…… 이 말은 조금 의외인데?’

이지혜는 차희라의 표정을 살폈다. 요 며칠 마주했다고 익숙해진 얼굴은 시시껄렁한 얘기나 뱉어내던 때와는 달리 진중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차희라는 빈말을 하지 않지.

“진심이야. 마침 붉은 용병에 머리 쓸 놈들이 싹 뒈져버렸거든. 그렇다고 남은 놈들한테 맡기자니 죄다 돌머리들 뿐이라. 일거리가 쌓이는 중이야.”

“……….”

“아, 영입하는데 이런 말은 하면 안 되나? 아무튼, 오면 섭섭치 않게 대우해줄게.”

그러니까, 며칠간 뻔질나게 드나든 이유는 인재영입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이지혜가 지금까지 검은 백조에서 쌓아 올린 인맥과 인프라를 버리고 붉은 용병에 갈 이유는 없었다.

“죄송해요. 저는 검은 백조가 좋아서…. 게다가 친해진 사람들을 두고 가는 것도 조금 그렇고요."

“……호오?”

“"아! 그렇다고 용병 여왕님의 제안이 싫다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과분한 영광이죠."

‘차희라 삐졌나? 이런 일로 삐지면 안 되는데. 지금까지 상대해준 게 얼만데, 설마 이런 일로 삐지거나 그러진 않겠지?’

의외로 차희라는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기세등등한 얼굴로 이지혜를 깔아봤다.

“알았어. 나중에 후회하지 마?”

차희라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홍차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였다.

‘이제 안 오려나’

오지 않는다면 오히려 좋은 일이다. 할 일은 언제나 많았다. 바쁘지 않더라도 차희라는 이지혜에게 언제나 거북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차희라는 다음날도, 그다음 날에도 계속 찾아왔다.

*

“용병여왕님, 제게 무슨 용건 있으신가요?”

스카우트 제의 후에 한 달, 차희라는 계속 검은 백조에 드나들었다.

“네가 마음에 든다니까?”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지혜는 고개를 내려 서류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스카우트 제의 이후 이주가 지나서는 계속 그랬다. 차희라는 이지혜를 마음에 들어 했고, 당장 죽일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차희라를 이지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대했다. 나를 죽이지 않고, 내게 이용당해주지도 않고, 의중도 모를 강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이지혜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웃음을 가장하고, 경계하며 허용범위를 쟀고, 이 정도 무례는 그 경계에도 들지 않았다.

“너, 요새 바쁜 것 같은데.”

“행정가는 언제나 바쁘죠.”

이지혜는 가식적으로 대응하며 손을 움직였다.

“아니, 그런 거 말고 너희 길드.”

“……….”

차희라는 이지혜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때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반응 보니까 알고 있었네. 이참에 붉은 용병으로 이전하는 건 어때? 잘 보호해줄게.”

차희라가 이지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전에 적선하듯 와인을 떠넘기고 갔던 때와 같이. 이지혜는 펜을 내려놓고 머리를 쥐었다. 이렇게 얕보이고 있었단 말이지.

“하,”

“왜, 갑자기 활로가 생겨서 머리가 어지럽니?”

“용병 여왕님.”

이지혜는 고개를 들어 차희라를 노려봤다. 제안이 당연히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한 듯 당당한 얼굴, 맹금류의 눈. 저 사람은 지배자이다. 이지혜는 그래서 차희라가 기분나빴다.

“너무 주제넘으시네요.”

“…….”

“검은 백조 내의 움직임은 모두 제 통제 속에 있습니다. 반동분자들의 규모, 무력, 작전까지. 전부 제 손안에 있어요.”

인정한다. 차희라는 타고난 맹수이고 지배자이다. 심지어 그를 뒤받쳐줄 무력이 있었다. 무력이 전부인 세상에서 그녀는 빠르게 자신의 진가를 보이고 이 세상의 지배층이 되었겠지. 그리고 항상 힘없는 타인들을 내려다보았으라.

“겨우 당신 따위가 참견한 일이 아니라는 소리야.”

약한 것들. 보호해야 하는 것들.

“알아들었으면 꺼져.”

나와 동등해질 수 없는 것들.

차희라는 눈을 크게 뜨고 이지혜를 바라봤다. 있어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 같기도 했고, 어딘가를 잘못 찾아온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으하하하하핫, 아하하하하하, 하하하하….”

이지혜는 허리를 꺾으며 웃는 차희라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봤다.

“하하……. 죄송합니다. 이지혜 씨. 제가 지금까지 저지른 무례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

“그동안의 무례에 대한 사죄로, 당신의 요청을 한번 들어드리죠. 붉은용병단을 이용하는 건 안 됩니다. 제 개인의 일이니까요.”

차희라의 사과를 믿지 않았다. 이 또한 밑에 있는 사람이 잠깐 반항한 것으로 비치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나쁘지 않은 보상이니 받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이지혜는 웃음 지었다.

“지금이라도 그 깨달으셨다니 다행이네요. 그 사과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이만.”

차희라는 답지 않게 시종일관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다가 갔다. 역시 피곤한 여자라고 생각하며 이지혜는 다시 서류를 처리했다.

그날 밤, 박연주가 죽었다. 대외적으로는 전쟁에서 입은 상처의 합병증 때문이라고 공표되었다.

*

공식적인 발표가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박연주는 외신전쟁에서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었다. 어느 정도 평화가 찾아온 후 반-박연주 파벌이 몸집을 불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들 정말 피 보는걸 좋아한단 말이야. 다들 평화롭게 지내면 얼마나 좋아? 서류도 줄고.”

집무실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두고 이지혜는 손톱을 정리했다.

“…….”

“그래서, 여기는 뭐하러 왔어? 나 죽이려고? 아니지, 죽이지는 않겠다. 쥐고 있는 일이 워낙 많으니까. 협박하려고? 무릎 꿇고 순순히 너희를 따라라?”

그들 중 대표자 하나가 나와서 이지혜에게 말을 걸었다. 이 반란의 주동자였다.

“……이 상황에서도 태연하네. 정도 없이.”

“연주 언니는 너희가 죽였잖아. 너희가 나한테 그런 말 할 주제가 된다고 생각하니?”

“독한 인간.”

주동자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항상 이지혜와 박연주를 보며 눈을 탐욕스럽게 빛내던 여자였다.

“나 바쁜 거 안보이니? 할 말 있으면 빨리하는 게 좋을 거야.”

전혀 바빠 보이지 않은 얼굴로 이지혜가 말했다.

“얌전히 우리를 따라, 이지혜. 네 권력 기반은 이제 없어. 무력은 없으니만큼 순순히 따르면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게 다야? 더 재미있는 말은 없어?”

“……”

이지혜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요즘 애들은 참신함이 없다니까. 그건 내가 말 한 거잖아.”

“네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닐 텐데.”

이지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립하던 사람들이 움찔했지만, 순순히 양손을 위로 들어 올리는 모습에 자리를 지켰다.

“이제 내가 말 할 차례인가?”

“뭐지? 요구사항은 수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들어주겠어.”

주동자는 이지혜가 순순히 나오자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내가 이 반란을 눈치 못 챘을까? 길드의 모든 일은 이지혜의 손을 거치는데?”

“……무슨 소리야.”

떨리는 목소리에 이지혜의 입가가 올라갔다.

“왠지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어? 내 감시망에 구멍을 발견했다던가, 꼭 필요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때마침 영입되었다던가, 연주 언니 호위가 허술했다던가.”

“……너!!!!”

“너희를 막는 사람들도 없었고, 이지혜는 제압하기 쉽게 길드 내에 혼자 있고.”

이지혜를 제외한 방안의 모든 사람이 술렁였다. 몇몇은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어 하는 듯했다.

“이지혜를 죽여!”

“얘들아.”

방의 구석에서, 이지혜의 뒤에서, 심지어 반란분자 무리에서 완전무장한 사람들이 나와 반란분자들을 제압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지혜!!!!!!!”

“쟤들 입 좀 막아. 너무 시끄럽다.”

반란분자들의 입에 하얀 천이 물려고 방안이 조용해지자 이지혜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말이 좀 조용해졌네. 이제 너희 처분을 결정해볼까?”

무릎 꿇려진 사람들이 창백하게 질렸다.

“왜, 너희가 하려던 것처럼 죽이기라도 할까 봐? 어떻게 그런 야만스러운 생각을 할 수가 있니?”

이지혜는 과장되게 한 손을 입에 대고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인텔리니까 그런 짓은 안 해. 대신 너희는 대륙을 위해 봉사를 좀 해줘야겠어. 요즘 전쟁하느라 지하 감옥 공략을 잘하지 못했잖니? 대륙의 모험가가 된 입장에서 그러면 안 되지.”

“우리의!”

묶인 사람 중 하나가 입을 열었지만, 그 소리는 제대로 된 말이 되지 못했다.

“나는 자비로우니까 기회를 줄게. 던전을 공략해. 너희가 던전에서 돌아온다면 나머지 길드원들도 너희를 용서할 거야. 어떻게 할래? 아, 말을 못 하는구나? 한 명만 풀어줘.”

이지혜의 손짓에 주동자의 재갈이 풀렸다.

“개소리마. 거기서 죽으라는 소리잖아.”

“어머? 누가 그런 무서운 소리를. 나는 던전을 공략하라고 했을 뿐이야? 공략하고 나오면 용서해준다니까?”

“…….”

“너희가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주동자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패배자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정말 던전을 공략하면 용서해주는 거지?”

“물론. 나는 약속을 지켜. 이 전과 같은 지위를 보장해줄게. 아무런 불이익도 없을 거야.”

이지혜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미소였다.

“……할게.”

“좋은 생각이야. 교국 남서쪽 끝에 새로 발견된 던전을 공략하면 돼. 연수 따라가서 준비물 챙기고 바로 출발해.”

“…….”

“행운을 빌어~”

이지혜가 하연수를 쫓아가는 무리를 보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다가 의자에 앉았다.

“흐음……. 다 갔니?”

“예. 그런데 이제 지혜 님께서 길드 마스터가 되시는 건가요?”

지혜를 유독 따라 아끼는 부하가 질문했다. 눈은 기대로 초롱초롱 빛났다. 아마 한자리 차지할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리라.

“어머, 검 하나도 못 드는 내가 어떻게 길드 마스터가 되니? 쓸만한 애 중에서 적당히 고를 거야.”

“네…….”

“걱정 마. 내가 너한테 뭐 하나라도 안쥐어줄까. 오늘은 수고했으니 다들 들어가서 쉬어.”

만족스러운 대답에 다들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집무실을 나섰다. 그들이 나서자 이지혜는 여신의 손거울로 차희라에게 연락했다.

“차희라님.”

-무슨 일이십니까, 이지혜 씨?

“저번에 하신 약속, 아직 잊지 않으셨나요?

-그럴 리가요. 잘 기억하고 있죠.

“30명, 아니, 네, 30명 정도 처리하실 수 있나요?”

-흐음?

손거울 너머에서 차희라의 의문 가득한 소리가 들려왔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아니, 차희라에게는 손쉬운 일일 것이다.

“사실 그보다 간단해요. 던전을 공략하고 나온 지친 사람들을 죽이는 일이거든요.”

-그런 일이라면 굳이 나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될 텐데요?

“아, 백조길드의 반란자들을 처리하는 일이라서요. 워낙 기밀을 요하기도 하고, 확실하게 처리하고 싶거든요. 또…….”

-또?

건너편의 목소리에 흥미가 가득 담겼다.

“저희 길드 일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서 할 일을 드렸는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하, 이지혜 씨.

감히 차희라는 이지혜를 아랫사람으로 봤다. 그러니 차희라에게 하찮고 천하며 아무런 보람도 없는 일을 떠넘길 것이다. 이것은 이지혜가 차희라에게 대놓고 떠넘기는 엿이었다. 이지혜는 그래도 되었다. 왜냐하면,

“아, 그리고 역겨우니까 어울리지도 않는 존댓말은 집어치우세요.”

-그래. 나도 그딴 말 하느라 구역질 났으니까. 그런데 당신, 나한테 이딴 식으로 대하고 멀쩡히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해?

“당연하죠. 당신은 나를 못죽이니까.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잘난 여자라서.”

-하, 하하, 하하하하? 진짜 건방져 당신.

차희라의 목소리가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이지혜는 그것이 기분 나빴다. 아래로 내려보는 그 시선이 불쾌했다. 언제나 아래로 끌어내리고 싶었다.

-좋아, 약속도 있으니까 이번 일은 내가 처리해줄게. 대신 각오해야 할거야.

통화가 끊겼다. 이지혜는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강한 새끼들이 싫어…….”

*

약속대로 차희라는 그 모든 반란 세력들을 저승으로 보냈다. 조금 심술을 부려 그들이 던전에 가기 전에 처리한 후 시체를 던전에 넣어버린 모양이지만, 그 정도는 예상 안이었다. 이지혜는 이 모든 정보를 차희라에게 붙여놓은 심복과,

“그래서, 만족해?”

차희라에게 직접 들었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알려주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뭐, 그래도 좋잖아? 나도 한 번 더 보고.”

차희라를 더 봐서 좋아? 집무실에 있는 차희라를 보자마자 이지혜의 기분은 최악을 달렸다.

“붉은용병단장님,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고작 그딴거 보고하려고 여기 오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아, 그렇지. 할 일이라……. 할 일이 있었어.”

차희라는 성큼성큼 다가와 이지혜의 목을 잡았다.

“그만 기어오르라고.”

이지혜는 고개를 들어 차희라의 눈을 노려봤다. 이지혜를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것 같은 눈이었다.

“그래, 너를 아랫사람 취급한 건 잘못이지. 그건 인정해. 그래서 내가 사과도 해줬잖아? 부탁도 하나 들어준다고 했고.”

“…….”

“그렇다고 네 뒤 닦는 데 쓰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나는 그래도 되지만 너는 그러면 안 되지. 역지사지 몰라, 역지사지?”

이지혜의 입에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마시죠. 사과는 지랄, 댁은 그냥 그 상황이 재밌어서 장단 맞춰준 거잖아. 구더기가 감히 맞먹으려 드는 게 가소로워서.”

“알고 있었네? 그랬으면 얌전히 내가 주는 콩고물이나 받아먹으면서 조용히 살아야지. 너는 원래 그런 인종 아니었니?”

짐승 같은 눈에서는 절대적인 여유가 엿보였다. 이지혜는 약자고 차희라는 강자였다. 아무리 이지혜가 쥔 게 많고 유용한 인재라고 하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이지혜쯤은 간단히 죽일 수 있었다.

“나는, 정말로, 당신 같은 인종이 싫어.”

“그래서? 더 말해봐.”

“당신은, 항상 사람들을 내려다보지. 아무렴, 당신은 강하니까. 내가 아득바득 살겠다고, 권력 한번 쥐어보겠다고 쌓아놓은 것들을 별 힘도 안 들이고 무너뜨려. 그리고는 사람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

차희라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너도 노력해서 강해지면 되잖아? 어디서 내 삶을 재단하려고 들어? 노력해서 강해지지도 않은 주제에 기생충처럼 강한 사람한테 빌붙어서. 부끄럽지도 않아?”

이지혜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노력? 노력이라고? 내가 머리 좀 좋고 아양이나 떨어서 이 자리를 얻은 줄 알아?”

“아니야?”

“아니냐고? 그래 맞아. 아양 떨고 머리 좀 굴려서 이 자리까지 왔지. 나는 이 세계에서도 강자가 되지 못해. 중요한 게 없거든. 거기서는 혈연이고 여기서는 무력이지. 손이 터지도록 검을 휘둘러봐도 재능있는 사람이 잠깐 연습한 것만으로도 나를 따라잡고, 아무리 마법을 공부해도 기초마법조차 제대로 쓸 수 없어. 그대로 갔다가는 권력은커녕 살아남을 수나 있었을까?”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대로 이지혜는 어딘가에서 객사하거나 평생 바닥을 기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머리가 좀 좋아. 그래서 생각했지. 이 빌어먹을 대륙에서 내가 안전하게 살아남고, 이왕이면 권력을 쥘 방법을. 결론이 나왔어. 댁 같은 강자나 권력자에 빌붙어서 최대한 아등바등하는 거야. 이건 내가 지구에 있을 때도 했던 일이기도 하고 잘할 자신도 있었지.”

차희라의 팔에서 힘이 풀렸지만, 이지혜는 느끼지 못했다. 그저 속에 있는 불을 토해내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덕분에 봐, 나는 지금 살아서 권력을 쥐고 있어. 물론 댁 같은 근육 머저리들도 있었지. 전부 죽었어. 무기 들고 설치다가 알아서 죽더라고. 멍청한 인간들.”

이지혜의 담담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위로 수십, 수백의 퇴적물이 쌓여 원래의 감정을 헤아리지도 못할 목소리였다.

“나는 당신이 싫어. 나도 노력해서 이 자리를 얻었는데, 나는 이렇게 기생충처럼 누군가에게 빌붙어서 살아가야 하는데. 당신은 혼자서 설 수 있지. 그리고서는 나를 버러지 취급해서 비참하게 만들어.”

“…….”

차희라는 입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몇 번 그렇게 반복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이지혜가 내쉬는 거친 숨소리만 가득했다.

“나는 살아남을 거야. 댁보다 오래. 당신은 밖에 나가 전투를 하고 나는 서류 업무를 하니까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그리고 당신 시체 앞에서 비웃어주지. 당신은 죽어 나자빠졌지만 나는 여기 살아있다고. 내가 이겼다고. 결국에는 내가 살아남았으니까.”

“………. 그러던지.”

차희라는 그 말만 남기고 황급히 검은 백조를 떠났다. 차희라는 혼란스러웠다. 저렇게 해묵은 악의와는 처음 마주했다. 워낙 시원스러운 성격 덕분에 본인도 주변도 후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단 한번도 누군가가 차희라에게 감히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차희라는 언제나 강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약자는 돌봄과 아량을 베풀 대상이었지, 이해의 대상인 적은 없었다. 질시는 있었으나 저런 식은 아니었다.

“모르겠다.”

차희라는 이지혜를 밟아준다는 원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붉은 용병으로 돌아갔다.

*

그날 이후로 차희라와 이지혜의 교류는 끊겼다. 정확히는 이지혜 쪽에서 원천 차단했다. 이지혜는 정말 유능하고 바쁜 사람이었으므로, 마음만 먹는다면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차희라는 이지혜의 행적을 알아보았다. 튜토리얼 던전에서 나와서 누구와 만나고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이지혜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살았는지에 대해. 이지혜는 엄청나게 많은 서류를 처리했고, 무수한 인맥을 쌓았으며, 수도 없이 많은 로비를 하고, 누구보다 민첩하게 시류를 읽어내 자신에게 유리하게 다루었다. 그래, 이지혜는 차희라가 경멸하는 전형적인 ‘줄타기 잘하는 기생충’이었다. 그러나 차희라는 그 흔적을 보고 도저히 이지혜를 경멸할 수 없었다.

도저히 인간이 처리할 수 없을 만한 일들을 처리하는 이지혜가 거기 있었다. 이지혜는 정말 죽지 않고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스스럼없이 몸을 담갔다. 그것들은 결코 옹호 받을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지혜의 삶은 전쟁 그 자체였다. 방식은 달랐지만 차희라보다 결코 만만하다고 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왔다. 차희라는 자신의 오만함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차희라는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에 처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기회는 의외로 빠르게 찾아왔다.

*

“그럼 이것으로 회담은 마무리하도록 하죠.”

이지혜가 선별해 고른 새로운 백조길드의 마스터가 마무리를 선언했다. 본래라면 끝까지 남아 인맥 관리를 했을 이지혜는 빠른 걸음으로 길드 내에 마련된 회담장을 빠져나갔다.

“잠깐만. 이지혜 씨. 거기 멈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이지혜는 걸음을 멈췄다.

“나랑 할 말이 있지 않아?”

“저는 없는 것 같은데요, 용병 여왕님.”

이지혜는 다시 웃으며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이 자리가 너무 껄끄러웠다. 이 전에 차희라와 만났을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명백히 이지혜답지 않았다.

“나는 있는데. 싫어도 좀 들어줬으면 좋겠어.”

‘그’ 차희라가 굽히고 나왔다. 마침 회담이 끝나 주변에 사람도 많았다. 백조길드의 실세와 용병 여왕의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수습하기 힘들었다. 막다른 길이었다.

‘’네. 그럼 제 집무실로 모시죠.”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지혜는 차희라가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할지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다.

“앉으시죠. 차는 뭐로 하시겠어요?”

“필요 없어.”

차희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님용 소파에 털썩 앉았다. 차를 제외하고는 이전과 다를게 전혀 없었다. 이지혜는 그 태도에 내심 안심했다.

“오늘은 무슨 말씀을 하러 오셨나요, 차희라님?

“……. 사과하러 왔어.”

“네?”

이지혜는 진심으로 의아해졌다. 차희라가 왜?

“그동안 무례했던 거. 미안했다.”

“……네?”

이지혜의 뇌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누가 뭘 해? 차희라가 나한테 사과를? 왜 하는데? 뭐 얻을 거 있나?

“뭐 필요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정치적 목적도 아니야. 그냥 지금까지 낮잡아봐서 미안해.”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그, 지금까지 낮잡아봐서 미안했고, 목 졸라서 미안해. 그냥 사과하고 싶었어.”

쑥스럽다는 듯이 표정을 찡그리며 말하는 얼굴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왜 용병 여왕님이 사과를 하죠? 당신은 실제로 나를 낮잡아봐도 되는 위치에 있어요. 그런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죠. 말해봐요. 필요한 게 있나요?”

“안 믿을 거라고 짐작은 했는데 말이지…….”

차희라는 이제 다른 의미로 표정을 구겼다. 골치 아프다는 듯이 오른손으로 머리를 헤집어놓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네 뒷조사를 해봤어.”

누가 들어도 기분 나빴을 소리를 차희라는 태연하게 말했다.

“알고 있어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아무튼, 나는 지금까지 이지혜의 행적을 봤지.”

“어떠셨나요?”

흐흠, 차희라가 헛기침을 했다.

“네가 사는 방식은 정말로 나랑 안 맞아. 솔직히 구역질 날 정도로.”

“그래서요?”

이지혜의 눈꼬리가 뾰족하게 올라갔다. 정적들을 말살하면서 듣는다면 모를까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게 댁이 사는 방식이잖아? 어쩔 수 없지.”

“그래서 결론이 뭔가요?”

“미안하다고. 내 사과받아주고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줬으면 하는 바람인데.”

맹수를 닮은 눈이 이지혜를 담았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르게 밑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지혜는 허탈해졌다.

“검은 백조와 붉은 용병은 혈맹이니 그런 사과가 아니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을 텐데요.”

“아니, 나는 너 말하는 건데. 너 마음에 들거든.”

“스카우트 하려고요?”

“그건 애초에 포기했어.”

이지혜가 픽 웃었다. 이 앞에서 혼자 날 세워봤자 바보 같아질 뿐이었다.

“사과 받아들이죠.”

“좋아. 이지혜 씨. 이 김에 그 어울리지도 않는 존댓말 집어치우라고.”

“아, 그건 싫어요.”

“너무한 거 아니야?”

차희라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자각하지 못했지만, 이지혜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이지혜 씨.”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차희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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