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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일상의 의무 by. 몰타망(@mangseang_FN)

-지혜진-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이었다. 그리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괜히 시비를 걸고싶은 문장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작은 힘에는 작은 책임만 따라야 하는 거 아닌가?

“내 인생은 왜 이 꼴인건지 몰라.”

이지혜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땅으로 떨어트린다. 무광의 검은 힐 아래로 밟히는 흰색 담배는 금세 짓이겨져 제 형체를 찾기 어렵다. 머금고있던 마지막 숨을 내쉰다. 희게 퍼져가는 담배연기는 사라진 담배의 유언인 셈이었다. 공기중에 전부 퍼져버리는 것은 아니었는지 은은한 태운 풀 향기가 온 몸을 감쌌다. 웃음이 났다. 처음 담배를 배웠을 때가 생각이 나서. 그녀에게는 모든것이 수단이었다. 취향마저도 목표를 위한 도구였다. 그래야만 했다.

담배연기. 이지혜에게 자신의 힘은 딱 그정도였다. 잠깐 머무는, 그리고 그마저도 미미하여 인지하려고 애를 써야 겨우 느껴지는 그런 정도. 하지만 그런데 왜 이렇게 책임져야 할 것은 많은지. 답답함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몸을 감싸고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속박이었으나, 이렇게 불현듯 더욱 거지같아질 때가 있었다. 담배가 그러했고, 그 담배를 짓밟아놓은 이 구두 또한 그랬다. 이것을 신지 않으면, 회사 건물에 들어가지도 못하니 이것은 의무이자 책임인 셈이었다.  

불편과 부자유함은 불공평이라는 명칭 대신 책임의 이름을 달고 돌아오곤 했다. 이지혜는 대놓고 불만을 표했으나,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네가 그 자리에 있는, 너의 그 힘에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해.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은 필경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누가보면 내가 회사 사장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 사장비서일 뿐인데. 내 권력도 아니잖아? 근데 책임은 내가 다 지는 꼴이란 말이지. 출근 전 마지막 자유시간마저도 현실에 꽁꽁 묶인 채였다. 좀 좋은 생각을 하려 해도 눈에 보이는 게 회사건물이니 뭐 어째.

“어쩌겠어…. 굶어 뒤질 수도 없고.”

들어가기 전에 담배라도 한대 더 태울까 했더니 아까 그게 돗대였다. 귀찮지만 사러갈까 싶어 딱 두 걸음을 떼었더니 귀신같이 비가 내린다. 담배도 편히 못 피우게 하네. 이것 또한 책임인지 뭔지 하는 걸까. 이지혜는 입에 담배도 없는데 깊은 숨을 내쉬고싶은 기분이 되었다.

주변의 소음도, 뱉어내어 사라진 담배연기도, 제 몸을 감싸는 은은했던 풀냄새도 모조리 쏟아지는 장대비에 씻겨내려간다.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다가 이지혜는 결국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쩔 수 없다. 그것은 체념이기도 하고 분노이기도 했으며, 어찌되었든 그녀의 인생 전반을 짓누르는 마법같은 단어이기도 했다. 어, 쩔, 수, 없, 어. 또각거리는 하이힐 굽 소리를 따라 걸음마다 글자가 내리눌러진다. 우산도 없이 쏟아지는 비를 맞고 걸었다. 체념의 글자가 더욱 무겁게 걸음을 끌게 만든 셈이었다.

 

잔뜩 젖은 채 회사건물에 닿은 것은 어떻게보면 일탈이기도 했다. 나는 너네가 원하는 모든 요소를 갖춰줬어. 근데 비가 오더라고. 항상 단정하게 차려입은 정장도, 틀어 올렸던 긴 머리도, 담배향을 덮지 않으면서도 좋은 향을 내던 향수도 모두 대자연의 힘에 흐트러진 상태였다.

“이지혜씨 되십니까?”

그리고 가장 큰 비일상이 시작된건 그때부터였다.

“…저요?”

“네. 이지혜씨 맞으십니까? 이 회사에서 비서로 근무하고 계시는….”

“맞는 것 같네요. 그쪽은 어떻게 되시죠?”

이지혜는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꺼내어 메모 어플을 켠다. 사장새끼. 손님을 자기 출근시간 전부터 불러? 그것도 로비에서부터 내가 데리고 올라가야 되게 만들어? 건물 밖에서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천둥의 바로 뒤를 이어 번개가 번쩍였다. 여전히 지랄맞은 날씨였다.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시야를 부산스럽게 만들었다.

기분전환을 하려해도 뭐 되는 게 없네. 조금 짜증스럽게 젖은 머리를 정돈하는 이지혜의 손에 수건이 쥐어진다. 이지혜를 찾던 그 사람이 자연스레 건넨 것이었다. 조금 얼떨떨하게, 하지만 거절할 필요는 없으니 마다하지 않았다. 이지혜는 제 머리를 털어낸 후 목에 수건을 둘렀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한장 더 드릴까요?”

답을 하기도 전에 목에 두른 수건을 스르르 빼앗기고 새로운 수건이 팔에 걸쳐진다. 뽀송뽀송하고 폭신한 감촉이었다. 이지혜는 어떤 힘에 이끌리듯 수건을 얼굴에 대고 꾹 누른다. 얌전한 섬유유연제 향이 후각을 뒤덮었다.

“사장님은 아직 출근 전이시고요. 열한시쯤 오시니까 일단 저랑 같이 올라가시면…”

“네? 괜찮습니다. 저는 이지혜씨에게 용무가 있는 것이라서요.”

수건의 뽀송함과 향기에 조금 기분이 좋아져 일정을 쭉 읊어주려던 이지혜는 말문이 막혔다. 이 회사에서 외부인이 자신을 찾아 올 일은 없다. 이지혜는 항상 이지혜가 아니라 사장비서였다. 제 이름이 누군가의 목적이 될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있어봐야 택배 배달정도?

“왜 저를 찾으시죠? 이상한 일이네요.”

“아…소개가 늦었습니다. 국가안전부 특수관리과소속 조혜진이라고 합니다.”

흰색의 옅은 펄감이 있는 종이 위에 단정한 글씨체와 푸른 잉크로 이름이 박혀있다. 국가안전부…? 이지혜는 9시뉴스에나 나올 단체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심지어 먼저 이름을 밝혀왔는지 의문을 가졌다. 당연하지 않나. 옛날 군사독재시절도 아니고 잡혀갈 짓이라고는 한 적도 없는데 저렇게 와서는 대체 뭘…. 게다가 특수관리과는 뭐야. 이지혜는 자신의 직책 상 꽤 많은 직업군의 사람을 만나야 했고, 그런 사람들을 응대하며 기분을 맞춰주는 것이 일이었으므로 직업이나 계급, 소속 등의 이름을 어떻게든 한 번씩 외우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억 어디에 스친 적도 없는 명칭이었다. 생전 처음 듣는단 말이지.

만날 일 없는 부서에서, 처음 듣는 소속의 사람이, 이지혜를 찾아온다. 좋게 말하면 비일상, 조금 더 경험에 빗대어보자면 사기인가. 이지혜는 헛헛한 한숨을 내쉰다. 좆같은 하루의 시작답다 정말. 정보를 노리고 수작질 하는 인간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성실하고 창의적인 사람은 또 처음인 것 같았다. 어쩌다 자신의 이름이 불렸다 했더니 사기꾼새끼였다 이거지.

“네. 돌아가시면 되겠네요. 저는 사장님이나 회사의 정보를 넘겨드릴 생각이 없어요. 그대로 발 돌려 나가지 않으시면 보안요원 부를게요.”

이지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창 밖에서 다시 번개가 번쩍인다. 이지혜는 손에 들려진 수건을 눈앞의 사람에게 내던지듯 건네주었다. 건네받은 여자는 안절부절 못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이내 이지혜의 손을 꽉 잡아온다.

“무례를…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진정하시고….”

“사기꾼새끼야. 내가 너 같은 인간들 한두 명 봤겠어? 작작하고 꺼져. 안 그래도 기분 거지같으니까.”

“사기꾼이라뇨? 제가요? 아닙니다.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요!”

비를 맞은 건 이지혜의 쪽인데, 본인이 더 비 맞은 개처럼 굴던 여자는 사기꾼이라는 말에 퍼뜩 놀라며 손을 더 세게 잡는다. 아파요. 이지혜가 그렇게 말하자 불에 덴 듯 화들짝 손을 놓기도 했다. 뭐하자는 건지. 이지혜는 말해보라는 듯 고갯짓을 한다.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믿기 어려우실 수도 있지만 지금부터 제가 말 하는 모든 내용은 기밀이며… 동시에 사실입니다.”

이지혜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갑자기 어디선가 조혜진과 비슷한 느낌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로비 군데군데에 서있던 보안요원들이 뭐라 통보를 들으며 끌려나가고 이지혜와 조혜진 둘을 둘러싼 검은 천 칸막이가 쳐진다. 붉은 빛을 깜빡이던 감시카메라가 빛을 잃어버리는 것도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이지혜가 놀라 뒷걸음질을 쳤지만, 조혜진은 다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이지혜 씨. 당신은 특수관리과의 보호를 받아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이지혜씨는 그걸 거절하지 못하십니다. 이지혜씨께서는 본인의 감정변화와 지구 대기변화가 연동된 S급 이능력자로 1시간 37분 전 능력발현 하셨으며 조절이 가능해질 때 까지 앞으로 저와 동행하게 되실겁니다.”

“…뭐라고요?”

“아직 긍정적 기분일 때는 화창하고 부정적 기분일 때는 비가오는 수준입니다만…아마 시간이 더 지나면 연동되는 현상이 늘어날겁니다. 지진이나 화산폭발 같은 대처 불가능한 재해가 발생할 수도 있어요. 저는 그것을 예방하기 위한 사람입니다.”

“아니, 아니. 그거 말고. 내가 뭐? 이능…뭐라는 거야. 약 했어요, 당신?”

“자세한 사항은 자리를 옮겨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저기…화를 가라앉혀 주세요. 비가 너무 많이 옵니다….”

창밖을 보면서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조혜진을 보며, 이지혜는 이 미친소리에 장단을 맞춰줘야하나 싶었다. 뭐, 손해는 아닐까. 수건을 쥐어주었던 것을 떠올려본다. 지금 뭐라 떠드는 저 말들은 착각인게 분명하겠지만 어쨌든 저쪽이 제 기분을 헤아릴 용의는 있다는 뜻이었고, 제가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챌 때 까지는 요구를 들어줄 거란 뜻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이것 또한 거절할 필요는 없는 것이겠지. 착각은 저쪽의 실책이고, 그 전까지 이지혜는 자기 이익을 잔뜩 챙겨두면 될 터였다. 회사에서 잘려도 괜찮을 만큼의 돈이라던가, 뭐 그런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럼 일단…운동화 하나 사다주세요. 발이 아프네. 검은색, 너무 푹신하지는 않지만 쿠션감은 좋은 걸로요.”

“네, 네. 그럼요. 230사이즈 맞으시죠. 아마 5분이면 될 겁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아, 그럼 던힐 6미리도.”

이지혜는 구두 속에서 물을 잔뜩 먹어버린 제 발을 꺼낸다. 맨 발로 로비 타일을 밟고 서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천막이 감싸고있으니 누가 볼 일도 없고, 게다가 잠깐 그러고 있기가 무섭게 조혜진은 그 발아래에도 수건을 깔아주었다. 정말 비위를 맞추지 못해 안달인 모습이었다. 이지혜는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비서는 자신인데, 조혜진의 모습은 영락없는 비서…아니 집사같은 모습이었다.

“우리 처음보는 사이인데 그렇게 나한테 저자세면, 그쪽 자존심이 아프거나 그러지는 않나봐요?”

“제 자존심이 가당키나 한가요. 이지혜씨한테 최대한 맞춰드리는 게 제 의무입니다.”

아 의무라. 이지혜는 금세 제 앞으로 배달된 신발과, 같은 브랜드의 트레이닝복 그리고 던힐을 본다. 내가 의무에서 벗어났더니 누군가는 또 의무를 갖는다네. 우스운 일이었다. 의무 보존의 법칙인가? 이지혜가 옷과 신발을 팽개쳐두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조혜진은 자연스레 라이터를 꺼내어 불을 대줬다. 결국 이지혜는 참을 수 없어 입 밖으로 웃음소리를 낸다.

“있죠. 혜진씨. 나는 지금까지 꽤 가벼운 힘과 막중한 의무를 져 왔는데 말이에요.”

“…….”

충성스러운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에, 이지혜는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고 말을 잇는다.

“이제 그럼 큰 힘에, 종잇장만한 의무를 좀 즐겨도 되겠네?”

그럼요. 원하는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조혜진의 대답과, 동시에 내밀어지는 재떨이에 이지혜는 담배를 눌러 끄고 그대로 그녀에게 몸을 기댄다. 좋아. 그럼 일단 옷부터 갈아입혀줘. 갑작스러운 접촉과 하대에도 조혜진은 당황하지 않는다. 원하신다면요. 그렇게 말하며 제 할일을 할 뿐이다.

아아. 앞으로의 일이 정말 기대돼서 미칠 것 같다. 이지혜는 제 발치에있던 하이힐과, 굽에 따라붙었던 체념을 가림막 너머로 던져버리며 벗겨지는 옷의 감촉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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