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의 신학 by. 09(@spmt120408)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도미니온스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곧 자신의 행동이 다소 인간 같음을 깨닫고 손가락을 들어 입을 살짝 가렸다. 인간의 문화가 사랑스럽긴 했으나 이렇게까지 깊게 빠져들었을 줄은. 그녀는 신에게 사명을 받은 자로써 긍지를 가지고 맡은 바를 현명하게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오전부터 이어진 회의에서도 내내 듣지 않았는가. 하루라도 빨리 성과를 내야만 한다고.
거기에는 그녀도 깊이 동의했다. 하나라도 더 많은 인간이 괴로움에서 해방되어, 안정된 대륙에서 평화롭게 살아갔으면 했다. 그러기 위해서 도미니온스는 충실히 일해야만 한다. ‘지친다.’니. 최근에 읽은 책이 그녀에게 가져다준 착각일 것이다. 깊게 빠져들어 읽고 나면 그 여운이 남아 있곤 하니 말이다.
방으로 돌아가면 작전을 검토하고, 기술적 해결을 요청해 온 부분에 대해 방법을 강구해 봐야했다. 발걸음을 재촉해 신전의 복도를 걷는다. 연이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장식들. 걷고 있는 복도 위는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 마침내 긴 복도 끝의 코너를 돌자, 시선 끝에 곧장 한 인영이 걸렸다. 그녀가 지나온 복도와 같이 아무도 없는 복도였기에 가장 먼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규칙적인 발걸음이 점차 좁아지다 이내 속도가 줄어들었다. 마침 그 인영도 마주 걸어오는 그녀를 발견했는지 지저분한 후드를 벗으며 정중히 인사를 건넨다. 살짝 숙이던 얼굴을 들자 언제나 벗지 않는 하얀 가면이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도미니온스님."
가면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변조마법으로 변형되었지만 어조만큼은 언제나 차분하다. 도미니온스는 그것이 편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손에 꼽을만큼 적었지만 인간과 나누는 대화임에도 불편함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도미니온스가 사랑하는 '인간'이었고, 인간의 문화에 대해서 잘 알았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본전이 아니라고는 하나 신전에 인간의 출입이 허락된 것은 그들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성스러운 신전에 있는 인간에게 보내는 천사들의 눈길이 곱지 않았다. '그들'도 알고 있기에 신전에 오기보다 밖에서 연락을 취하거나 대기하는 일이 많았다. 하물며 지금 그녀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의문은 곧 그녀의 대답으로 풀렸다.
"인간들의 전선을 무너뜨렸습니다. 물러날 곳도 이제 얼마 없겠죠. 그 전에 전체적으로 재정비가 필요할 것 같아, 다른 분들과 함께 일시적으로 귀환했습니다."
다른 분들. 도미니온스는 저와 같은 사명을 받은 케루빔과 세라핌, 쓰로누스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와 같이 하얀 가면을 쓴 남자도.
"휴식도 필요했고요. 가엾은 인간들이 희생되는 모습을 보셨으니 그분들도 많이 힘드셨을 겁니다."
도미니온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서늘하고 슬퍼졌다. 특히 인간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쓰로누스는 더 힘들었을 테다. 그녀의 말대로 재정비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조심을 기울이는 것에는 얼마의 정성을 쏟아도 아깝지 않다.
"저희들은 밖에서 대기하겠다고 했지만 쓰로누스님께서 함께 가자고 하셔서...세라핌님도 함께 작전을 짜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쓰로누스는 가면을 쓴 남자를 유독 챙겼다. 세라핌도 그를 잘 따랐다. 그의 작전은 분명 좋은 결과를 내지만 극단적인 면이 있어 도미니온스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그것이 세라핌에겐 다르게 비친 모양이었다. 그들의 의견이 탐탁지 않았을 케루빔의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생각이 깊어지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여린 손이 그녀의 늘어진 머리칼을 살짝 훑었다. 도미니온스는 놀란 듯 어깨를 떨었으나 손을 피하진 않았다. 머리를 땋아 내리고 남아 얼굴 옆으로 늘어트린 머리칼을 손가락이 감아 모았다. 하얀 가면이 도미니온스를 살피듯 가까이 다가왔다.
"도미니온스님도 피곤해 보이세요."
"저희들은 이정도로 지치지 않습니다."
"그렇죠. 하지만……."
손가락 안에 감아 모인 머리칼을 정돈하듯 빗어 내렸다.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한숨을 쉴 것 같지는 않나요?"
그럴 리가요. 도미니온스는 목까지 찬 말을 꺼내놓지 못했다. 그녀는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럴 때 고민이 많다고 하죠. 수심에 잠겨 보인다고 표현하기도 해요."
도미니온스도 책에서 읽어본 적 있는 문장이었다. 인간의 책은 그런 면이 흥미로웠다.
"피부가 푸석한 것 같다고 하는데, 고민이 많으면 잠을 못자거든요. 잠을 못자면 피부가 안 좋아져요."
읽어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전투가 길어져 밤을 꼬박 새야했을 때다.
"하지만 도미니온스님은 수심에 잠기셔도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고작 말 한마디에 낯이 뜨거운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아름답다. 그러한 수식어는 들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들은 모두 똑같이 신이 정성스럽게 만든 피조물들이기에 아름답다는 말이 쓰이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까. 손가락이 땋아 늘어뜨린 머리의 윤곽을 따라 더듬는다. 한때 그녀가 알려준 대로 땋아 내린 머리칼이다.
"휴식도 취할 겸, 체스를 두기로 했답니다. 도미니온스님도 함께 어떠세요?"
"좋습니다."
제가 대답하고도 도미니온스는 머리 한쪽 구석으로 오늘 해야 했던 일에 대해 물었다. 허나 그녀의 말대로라면 휴식도 중요하다. 도미니온스는 물음을 밀어내며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그들이 모인 곳은 본전과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신전의 방이었다. 외부에 다녀온 천사들이 잠깐 쉬는 용도로 쓰는 방은 장식품도 가구도 없었다. 탁 트인 넓은 방에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 두 개, 커튼이 없는 창 앞에 놓인 긴 소파 뿐. 본전에 있을 자신들의 방에 가지 않은 것은 분명 도미니온스와 동행한 '그녀'와 세라핌의 맞은편에 앉아 허벅지를 두드리고 있는 '그' 때문일 것이다. 쓰로누스는 그들의 옆에서 체스 판을 보고 있었고, 케루빔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왔어? 누나."
막 검은 폰을 움직인 그가 고개를 돌리며 퍽 친근하게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녀도 친근하게 인사를 받으며 그의 옆에 서서 체스 판을 내려다보았다.
"어때요?"
"누나는 보기만 해도 알지 않나?"
"글쎄-"
그녀가 등을 굽히며 체스 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그녀의 태도가 케루빔의 옆에 앉으려했던 도미니온스의 발길을 붙들었다. 체스판 위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도미니온스님은 어떤 것 같나요?"
그녀가 체스판 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도미니온스는 제 마음을 들킨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받은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을 감추며 차분하게 걸음을 옮긴 도미니온스는 체스 판을 내려다보았다. 앞으로 5수면 세라핌이 체크메이트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라핌도, 도미니온스도 '체스'라는 인간의 게임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과 우리들은 배움의 속도가 다르다. 도미니온스는 그것이 그들을 만든 신의 안배라 믿었다. 인간들을 이끌어 구원하기 위해. 또 그들의 문명을 지키기 위해. 우리들의 신도 분명 인간들의 문명을 사랑하리라. 도미니온스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곧 끝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요? 제가 오빠 대신 두고, 세라핌님 대신 도미니온스님께서 두시는 거죠.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세라핌은 못마땅한 듯 보였으나 거절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 도미니온스는 세라핌이 비켜선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그녀가 앉았다. 그녀의 옆에는 그가 섰다. 그녀와 함께 체스를 두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처음은 체스를 배웠던 때. 그것을 간단한 연습게임으로 셈하면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도미니온스는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는 것을 느꼈다. 고양된다는 말이 이런 느낌일까 생각했다. 수를 읽은 대로 흰 말을 움직였다. 대항하듯 거침없이 검은 말이 움직인다. 읽은 대로였다. 겨우 5수. 도미니온스가 읽은 것을 그녀가 읽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의문이었다. 그녀는 왜 질 것이 뻔한 판 위로 뛰어들었을까.
“도미니온스님.”
별안간 이름이 불려 도미니온스는 떨리며 곤두서려는 날개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도미니온스님의 이름은 참…마음에 들어요.“
도미니온스가 움직인 흰 말에 따라 검은 말이 사지를 향해 움직였다.
"도미니온스님은 이름의 뜻을 알고 계시나요?“
"물론입니다. 저희의 신께서 내려주신 이름이니까요."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들의 신이 준 이름이었다. 이름은 곧 그들의 사명이기도 했다.
"제 이름의 뜻은…."
"지배."
"…네."
인간들을 이끌기 위해 신께서 주신 이름이다. 도미니온스가 그렇듯이 천사라면 누구나 자신의 이름과 사명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얼마나, 달콤할까요."
도미니온스는 기계적으로 흰 말을 움직였다. 얼마 남지 않았다. 검은 말을 움직이며 그녀가 작게 무어라 속삭였다. 킹으로 가는 길이 비었다. 도미니온스는 되묻기보다 흰 말을 움직여 게임을 끝내기로 했다.
"체크메이트."
주위에 잠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턱을 괴고 있던 그녀의 손이 물처럼 꽉 들어찬 침묵을 헤엄치며 체스판 위로 뻗었다가 호선을 그리며 도미니온스에게 내밀어 졌다.
한참 빈손을 가만히 보던 도미니온스는 뒤늦게 악수를 청하는 것임을 깨닫고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단정히 정리된 머리칼과는 연결 짓기 힘든 거친 손이었다.
"즐거웠어요, 도미니온스님."
"저도,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함께 둘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좋겠네요. 그때는 꼭 이기고 싶어요."
등을 돌리는 그녀의 옆으로 그가 한 몸처럼 달라붙었다. 도미니온스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판을 내려다 봤다. 체스 판 위를 헤엄치던 그녀의 손이 끝내 마음에 걸렸다.
의심을 안고 보자 미처 보지 못한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검은 얼룩이 보였다. 아. 검은 말. 비숍. 앞으로 빠르면 2수, 완벽하게는 6수면 검은 말이 하얀 킹을 죽일 수 있었다.
***
“당신이 내게 무릎을 꿇는다면, 얼마나 달콤할까.”
그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그날의 기억에 짓눌려있던 도미니온스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여전히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팔과 몸을 칭칭 감은 검은 밧줄이 숨을 압박했다. 몸을 누인 바닥은 신전의 바닥과는 다르게 거칠고 차가워 온몸의 신경을 일깨웠다. 의식을 잃기 전에 맞은 뺨과 여러 차례 짓밟힌 날개가 통증을 호소했다.
“도미니온스.”
그것을 행한 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도미니온스의 이름을 불렀다. 눈동자를 굴려 앞을 보면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생소하지만 부드럽게 이름을 부르는 분위기만큼은 기억 속 그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깼어?”
“…역겨운 인간….”
텁텁하게 막힌 목 사이로 나온 것은 평생 크게 써볼 일이 없었던 모욕적인 언어였다. 허나 그 언어로도 도미니온스의 감정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었다. 미처 담지 못하고 속에 고인 감정은 더 습하고 날이 가득했다. 악마 이상의 모욕을 찾아내지 못한 도미니온스가 이를 악 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나 도미니온스를 향해 걸어왔다. 굽이 높은 구두소리가 바닥을 타고 도미니온스의 몸을 차갑게 울렸다. 소용없다는 걸 알고도 밧줄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도미니온스의 등을 강한 힘이 내리눌렀다. 처음부터 있었는지, 그녀가 부리는 악마가 범인이었다. 어둠 속에서 연기처럼 나타난 그것은 형체가 되어 몸부림치는 도미니온스의 등을 밟았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비둘기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말해줬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면 내가 너무 봐줬나?”
몸을 묶이거나 짓밟히는 와중에도 흐트러지지 않은 땋은 머리를 하얀 손이 주워들었다. 기억 속과는 다른 깨끗하게 정돈된 하얀 손이었다. 손톱 끝은 매끄럽게 칠까지 되어있었다. 손이 시야를 벗어나자 도미니온스는 목이 꺾여 강제로 그녀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밧줄이라도 당기듯 거칠게 머리칼을 잡아당긴 그녀가 눈을 마주치자 보란 듯이 싱긋 웃었다.
“전의 나는 많이 봐준 모양인데. 그거 접대용인 건 알지?”
도미니온스는 마른 입술을 잘근 씹었다. 오래된 패배의 흉터가 쓰라렸다. 굴욕감에 날개가 파르르 떨렸다. 그럼에도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도미니온스’로 태어나 이런 무력감과 굴욕감은 처음이었다.
“내 몸을…돌려줘.”
발끝부터 뻗어오는 무력감을 애써 떨쳐냈다. 빼앗긴 몸을 되찾기 위한 마지막 발버둥 앞에 그녀는 눈을 휘며 웃었다. 도미니온스에 비하면 형편없는 힘을 가진 손이 턱을 틀어잡았다.
“무릎 꿇고 구두를 핥으며 잘못했다고 빌어봐. 그럼 돌려줄 마음이 들지도.”
하얀 가면 너머에서 그녀도 그렇게 웃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웃음과 과거의 기억을 겹쳐보다 도미니온스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꼭 돌려받을 필요 있을까? 너보다 내가 더 잘하는 것 같거든.”
“…….”
“프레젠테이션 봤지? 원로들의 얼굴도 말이야. 네가 할 때는 항상 못 마땅했잖아.”
악마의 속삭임이다. 귀에 스며드는 말이 바닥에서 더 바닥으로, 도미니온스를 끌어 내렸다. 붙잡힌 발목 끝에는 그녀의 말을 인정하고 마는 도미니온스가 있었다.
“역겨운…”
“이 넘치는 신성 느껴져? 이런 걸 성과라고 하는 거야.”
도미니온스는 제 것이었던 신체에 숨이 막히도록 흘러넘치는 신성을 느꼈다. 그녀에게 주어진 힘이다. 그녀는 마치 작은 세계의 신처럼 거대했다. 실제로 그녀가 창조한 작은 세계를 보았다. 세계 안의 인간들을 보며, 도미니온스는 자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들도 신에게 만들어진 존재였으니.
“어때? 이제는 무릎 꿇고 빌어볼 마음이 좀 들었니?”
“역겨운…악마….”
아니다. 그녀는 신이다. 도미니온스는 그녀가 언제든 죽일 수 있는 하얀 말이다. 의식이 다시 새카만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주어지는 상처럼 턱을 잡았던 손이 이제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이번에는 좀 도움이 되는 기억을 떠올려 봐. 이런 걸 일일이 기억하고 떠올리는 건 귀엽긴 한데.”
이마 위로 온기가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 몸을 맡긴 도미니온스는 그것이 신의 자비이길 바랐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잘 시간이야, 도미니온스.”